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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조

시 조

ma06.png 양천허씨의 시조는 공암지방의 호족이었던 허선문(許宣文)이다.

그는 공암현(孔巖縣)에 세거하면서 농사를 지었는데, 왕건이 견휜군을 정벌하기 위해 남쪽으로 향하던 중 군량미가 떨어져 위기에 처했을 때 왕건을 도와 후삼국통일에 지대한 공을 세우게 되었다. 이에 왕건은 선문(宣文)을 공암촌주로 봉하고 공암현을 식읍(食邑)으로 하사하였다. 이로 말미아마 본관을 공암 허씨로 하였고, 후에 공암이 양천으로 개칭됨에 따라 양천허씨로 불러지게 되었다.

공암바위는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11호(문화재지정 1991년 12월 24일)지정되었다.

서울특별시 강서구 가양동 산1~2.  시대는 삼국시대이전이다.

 

양천허씨의 강릉 입향조는 초당허엽이다.

허엽은 명종 8년(1553년)장령으로 있을 때 종가에 불이 타자 이를 다시 짓기 위해 황해도 만호에게 재목을 수송해 오도록 한 것이 문제가 되어 벼슬자리를 그만 두고 처가가 있는 강릉으로 내려왔다, 초당허엽(許曄)은 처가가 있는 강릉으로 내려온 후 현 강릉시 초당동에 기거하였는데 마을이 번성하자 그의 호를 붙여 ‘초당(草堂)’이라 칭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초당동의 유래는 초당 허엽(許曄)과 허균, 허난설헌, 등 허씨 집안과 관련된 것이다.

초당동475-3번지 터에서 난설헌이 태어나셨으며 7세 무렵 서울로 올라가기 전까지 교산허균과 소년의 꿈을 키우던 곳이다. 강릉에는 허성의 후손들이 세거하였는데 승지공 허돈은 허성(許筬)의 손자이다.

배위 강릉김씨는 현감 지안(志顔)의 딸이고, 묘는 강릉시 초당동 산8번지에 고상비하(考上妣下:할아버지는 위, 할머니는 아래) 연분(連墳)이며 후(後)배위 풍천임씨(任氏)묘는 경포 문미(汶浘:냇물이 바다로 흐른다)경포 「라카이샌드파인」 입구 양지바른 곳에서 1974년 이른 봄에 안현동 산48번지로 이장하였다.

 

 

ma06.png 허가바위(許哥바위) 

양천 허씨 시조 허선문(許宣文)의 발상지

이 바위굴에서 양천허씨(陽川 許氏)의 시조 『허선문(許宣文)』이 살았다는 설화가 있기 때문에 이 굴(窟)을 양천 허씨(陽川 許氏)의 발상지라고 부른다. 서울특별시 강서구의 최초 지명은 제차파이현(齊次巴衣縣)으로 제차(차례 또는 갯가),파의(바위)라는 의미를 지님으로써 강서구 최초의 지명이 이곳 ‘허가바위’로 부터 나왔음을 알 수 있다.

 

허가바위는 탑산아래 천연적인 바위동굴이다. 옛날 석기시대 사람들이 한강 가에 조개들과 물고기를 잡으며 이곳에서 살았으리라 짐작되는 혈거(穴居:동굴 속에 삶)동굴로서 연구가치가 매우 높은 이 굴(窟)은 올림픽대로가 건설되면서 육지로 변하였으며 현재는 영등포공고 정문 앞에 위치한다. 굴의 크기는 가로 약 6m, 세로 2m, 길이 약 5m이며, 사람들 10명 이상이 들어갈 수 있는 규모다. 경기 읍지에는 이 바위와 관련된 기록이 있다. 기록에 따르면 고려가 건국될 무렵 이 곳에는 허선문(許宣文)이라는 이가 살았다고 한다.

 

그는 나이가 90이 지났는데도 고려 태조를 왕건을 섬겼다. 왕건이 견훤을 정벌할 때 그가 군사들을 격려한 공이 커 공암의 촌주(孔巖村主)로 임명되었다. 그 후 그의 자손들이 공암 허씨(孔巖許氏)가 되었는데 신라시대에는 이곳을 공암(孔巖)이라 불렀고, 고려시대에는 양천(陽川)이라 불렀으므로 공암 허씨(孔巖許氏)는 양천 허씨(陽川許氏)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 후 양천허씨의 자손은 번창하였으니 조선시대 동의보감《東醫寶鑑》을 저술하신 의성 허준(許浚),홍길동전《洪吉童傳》을 지은 교산 허균(蛟山許筠), 천재여류시인 난설헌 허초희(蘭雪軒 許楚姬), 조선조 세조 때 북병사(북병사)로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허종(許琮) 등이 모두 양천 허씨(陽川許氏)다.

 

[허가바위]

* 지정번호 : 서울시 기념물 제11호

* 문화재청 지정일자: 1991년 12월 24일

* 관리자 : 강서구청장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서구 가양동 산 1-2

* 시  대 : 삼국시대 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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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암•허가바위(서울시 기념물 제1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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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 『강서의 역사,문화,문화재』,서울특별시 강서문화원

1994 『우리고장의 역사와 민담』,강서구청

2018 강서구청

 

ma06.png 양천허씨(陽川 許氏)의 세계(世系)

양천허씨의 시조는 공암지방의 호족이었던 허선문(許宣文)이다. 그는 공암현(孔巖縣)에 세거하면서 농사를 많이 지었는데, 왕건이 견훤군을 정벌하기 위해 남쪽으로 향하던 중 군량미가 떨어져 위기에 처했을 때 왕건을 도와 후삼국통일에 지대한 공을 세우게 되었다. 이에 왕건은 선문(宣文)을 공암 촌주로 봉하고 공암현을 식읍(食邑)으로 하사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본관을 공암 허씨로 하였고, 후에 공암이 양천으로 개칭됨에 따라 양천 허씨로 불려지게 되었다.양천(陽川) 허씨는 양천의 토성(土姓)이다. 양천은 본래 고구려의 제차파의현(齊次巴衣縣)이었는데, 신라 경덕왕 때 공암(孔巖)으로 고치어 율진군(栗津郡,지금의 과천)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고려 현종 9년(1018)에 수주(樹州, 지금의 부평)에 속하 고, 충선왕 2년(1310)에 비로소 양천현이 되어 현령을 두었다.조선시대에 들어와서 그대로 따랐으며, 고종 32년(1895)에 양천군이 되어 인천부의 관할이 되었다가 다음 해에 경기도에 속하였다. 그 뒤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김포군에 편입되어 양동면과 양서면이 되었다.

1963년 2개면이 서울특별시로 편입되고, 1977년에 강서구가 신설되면서 강서구에 편입되었다가 1988년에 강서구에서 양천구가 분리, 신설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양천은 현재 가양동 지역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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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조 공암촌주 이하 9세조 제단(祭壇) 전경 위치 : 김포시 고촌면 풍곡리 산 8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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