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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숙공 허엽과 초당의 역사

문숙공 허엽과 초당의 역사

문숙공 허엽(文肅公 許曄)과 초당(草堂)의 역사

 

초당(草堂) 허엽(1517∼1580) 공은 시조(始祖) 선문(宣文)의 20세손입니다. 양천허씨의 강릉 입향조는 허엽 공으로서 자는 태휘(太輝)이고, 호는 초당(草堂), 시호는 문숙(文肅)과 문간(文簡)입니다.

서경덕의 문인으로 1540년(중종 35) 진사시에 입격하고, 1546년(명종 1)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1551년(명종 6)에 홍문관 부교리를 거쳐 사가독서(賜暇讀書)한 뒤 1553년(명종 8) 장령으로 있을 때 종가(宗家)가 불이 타자 이를 다시 짓기 위해 황해도 만호(萬戶)에게 재목을 수송해 오도록 한 것이 문제가 되어 벼슬자리에서 물러나 그때 처가가 있는 강릉으로 내려왔습니다.(明宗實錄 卷15, 8년 9월 辛酉條:20-159). 그 후 강릉시 초당동에 기거하였는데, 마을이 번성하자 그의 호를 붙여 ‘초당(草堂)’이라 칭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다음과 같은 학술적 근거를 제시합니다.

 

첫째, 교산. 난설헌을 비롯하여 가족사에 대한 기록을 남겼을 것으로 판단되나 전란 등 수 세기 동안의 세월이 흐르면서 문헌이 남아있지 않아 선대로부터 전해오는 구전(口傳) 등에 의한 입증

 

(1) 강릉시 사천면 판교리에서 선대로부터 10대를 살아온 후손 허연(당시 78세)은 1969년 5월 2일 「중앙일보(제1122호)」 권혁룡 기자가 자택을 찾아와 때 묻은 고서(古書)를 열람하던 중 허난설헌이 8세 때 쓴〈광한전백옥루상량문〉을 보고 탄생지 물음에 초당동 이광노 교수가 살고 있는 집에서 출생하였다고 지목하자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1589) 生家발견 -강릉시 초당동의 고가(江陵市 草堂洞 古家) 난설헌(蘭雪軒)의 詩와 일치돼” 라는 기사(記事)를 냈는데, 후손이 증언(證言)하여 언론에 발표된 것은 이때가 처음입니다.

 

(2) 난설헌의 11대 후손 성신여대 허미자 교수는 한국여성문학연구『韓國女性文學硏究』(태학사)에서 “난설헌은 강릉 초당리(草堂里)에 있는 집에서 1563년에 태어났다. 그가 어렸을 적에 아버지와 오라버니들의 벼슬길은 순탄하였다”고 하였습니다.

 

(3) 『양천허씨실록(陽川許氏實錄(367쪽)』“21世 초희(楚姬) 1563(명종 18)~1589년(선조 22) 난설헌은 강릉시 초당동 475의 3번지에서 태어나 7세 무렵까지 살면서 이웃 사천면 하평리 외가(외조부:김광철 예조참판)를 오가며 유년기를 보냈고 15세에 시집갈 때까지 문학의 수학기를 거쳤다.”고 합니다.

 

(4) 『양천허씨세고(陽川許氏世稿(372쪽)』(上) “강릉시 초당동 허난설헌 탄생지인 475번지의 3호임을 밝혀 둔다”고 하였습니다,

 

(5) 『허씨 오문장가 한시 국역집(許氏 五文章家 漢詩 國譯集)』의 허초희의 생애와 한시(179쪽)에서 “허부인은 강릉 초당에서 태어나 아버지 허엽, 동생 허균과 함께 7세 무렵까지 살면서 유년기를 보냈고 15세에 시집갈 때까지 문학의 수학기를 거쳤다. 허부인의 당호인 난설헌의 의미는 여성의 미덕을 찬미하는 ‘난혜지질’(蘭惠之質)에서 난을 따왔고, 눈 ‘설’자는 여성의 뛰어난 문학적 재능을 유서재(柳絮才)라 하고, 그 버들개지를 눈에 비유하여 서설(絮雪)이라고도 하므로, 지혜롭고 문학적 재능을 지닌 여성, 여성으로서 고결하고도 뛰어난 문재(文才:글재주)를 지녔음을 암시한다.”고 언급하였습니다.

 

 

둘째, 교산(筠)의 『학산초담(鶴山樵談)』에 밝힌 문헌적 근거

 

(1) 임진왜란 때 교산 허균은 강릉 외가에 머무르던 25세 쓴 교산은 자신이 편찬한 최초의 시문집『학산초담(鶴山樵談:청학산의 나뭇꾼이야기)』에서 “작은 형과 난설헌도 또한 임영땅(臨瀛,강릉)에서 태어났음을 밝혔습니다. (仲氏與蘭雪 赤可謂孕精於臨瀛矣)” 하여 자신을 포함하여 세 형제의 고향이 고려 때부터 임영이라 불린 강릉임을 자랑스럽게 밝혔다. 하곡 허봉. 난설헌 허초희, 교산 허균은 동복(同腹 한 어머니에게서 난 형제)으로, 어머니 강릉김씨 애일당 김광철 공의 따님이라고 하였습니다.

 

(2) 허부인 난설헌은 강릉 초당에서 아버지 허엽과 함께 살았습니다. 허균의 『을병조천록』에 의하면, 고향 강릉을 뜻하는 ‘향(鄕)’이 들어간 표현은 약100여 수의 시편에서 다양하다. ‘鄕心(시골 생각)’ 鄕山(시골 좋은 고장)’ ‘故鄕(태어나 자란 곳)’ ‘吾鄕(나의 고향)’ ‘舊鄕(옛날 고향)’ ‘關東(강릉)’ ’鑑湖(경포호)’ ‘故鄕月(고향 달)’ ’關東舊業’(관동옛집별장)’ ‘舊業江陵宅(옛집별장 강릉집)’‘鑑湖舊宅(경포호 옛집)’이 있으며, 고향의 간접 표현은 ’故園(옛날 살던 동산)’ ‘故廬(고향 집)’ ‘家山(고향 산천)’ ‘강릉댁(江陵宅)’ ‘애일당’‘이설당’ ‘초당’ 등을 썼고 강릉은 어머니 품과 같은 곳이었고 시심(詩心)의 원천이기도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셋째, 강릉고적보존회, 문화재청, 강릉시, 강릉문화원 등의 저서에 허난설헌과 관련한 내용

 

(1) 난설헌이 고향 강릉으로 오기 위해 동생 허균과 넘던 대관령(단원 김홍도 그림)과 난설헌의 애일당 시는 현재 전하지 않으나, 강릉고적보존회(江陵古蹟保存會)가 소화 8년(1933) 당시 강릉군수 농택 성(瀧澤 誠 일본명 다카사와 마꼬도)에 의해 편찬된 증수 임영지 전(增修 臨瀛誌 全)』“성행소저유난설헌행간세(成行所著有蘭雪軒集行干世:그가 남긴 난설헌집이 세상에 전한다)”고 하였습니다,

 

(2) 『강릉시사 상(江陵市史 上(1087쪽)』(1996). 제2장 허난설헌 조선이 낳은 천재 시인에서 “허난설헌은 명종(明宗) 18년(1563) 초당동에서 허엽(1517~1580), 자(字)는 태휘(太煇), 호(號)는 초당(草堂)의 셋째 딸로 태어났다. 이름은 초희이고 자(字)는 경번(景樊), 난설헌은 그의 호(號)이다. 아버지 허엽은 조선조 기(氣) 철학을 대표하는 서경덕(1489~1546), 자(字)는 가구(可久). 호는 화담(花潭)의 제자로, 일찍이 성균관대사성, 대사헌, 홍문관부제학, 경주부군, 경상도 관찰사 등을 역임한 바 있는 학계의 대표적 유학자였다”라고 하였습니다.

 

(3) 문화재청과 강릉시. 강릉대 박물관에서 펴낸(1995년)『강릉의 역사와 문화유산(472쪽)』 강릉시 초당동 이광노 가옥에 대하여 “조선시대 대표적인 여류시인 허난설헌(1563~1569)이 태어난 곳으로 전해지며 건립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다”고 하였으며, 같은 책 초당동 동제(575쪽)에서 “초당동 지명은 조 조 광해군 때 홍길동전의 저자인 허균의 부친 초당 허엽 선생이 이곳에 살면서 붙였다고도 하고 강릉최씨들의 초당이라는 뜻이라고도 말한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연화부수형 초당(588쪽) 초당동의 풍수 전설에서 “옛날에 허균 생가 그 터이 좋다하는데 초당하면 그 집터에 제일 부자가 살았어요. 선교장 밑에 산꼭대기에 올라서서 저 아래 초당 아모야 집이 요번에야 물이 틀림없이 들었겠지 했는데 소문을 들으니 마당에도 물이 안 들어왔다는 게야. “아차 저기가 연터구나, 저기는 뜨는 터로구나” 말이야. 근데 마당에 물이 안들어왔으니 그걸 연화부수형이구나 했던 거요. 그 집터 좋다는 기 강릉에 소문이 났단 말이야.”라고 하여 초당의 명당터에서 난설헌 같은 천재 여류시인이 탄생하였다는 것을 거증(擧證)하였습니다.

 

(4) 강릉문화원 발행『강릉동족(同族)마을』 589쪽(강릉원주대 사학자 박도식 교수)』에서 “허난설헌(許蘭雪軒,1563~1589) 본명은 초희(楚姬), 자는 경번(景樊)으로 강릉시 초당동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진다고 하고 있으며, 허균(1569~1618) 자는 단보(端甫), 호는 교산(蛟山). 학산(鶴山). 성소(惺所). 백월거사(白月居士)로 강릉부 사천 외가(애일당)에서 태어났다. 허균의 외조부가 지은 애일당은 동쪽으로 대해(大海)와 북쪽으로 오대산. 청학산. 보현산이 바라보이는 언덕 위에 있었다. 애일당 뒤에 있는 산등성이는 이무기가 기어가듯 꾸불꾸불한 모양을 이루고 있다고 해서 예로부터 교산(蛟山)이라고 불러왔다. 허균이 자신의 호를 교산이라고 한 것도 그의 출생지와 관련하여 지은 것으로 생각한다. 고 했습니다.

 

강릉시 발행 『교산허균선생 문집』(국역본, 2002, 장정룡 교수) 허균선생의 연보에는 “1세(1569, 선조2년) 교산은 악록 허성, 하곡 허봉, 난설헌 허초희의 아우로 강릉 사천 애일당에서 태어난 후 초당에서 어머니와 함께 살다가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옮겨 건천동에서 자랐으며 9세 때(1577) 상곡(庠谷:明禮坊)으로 이사를 갔다.”고 하였습니다,

 

(5) 강릉문화원 발행『강릉고을 땅이름 유래』(2008년 12, 30. 김기설 지음 306쪽) 애일당(愛日堂) 터 솔마지에 있는 조선조 중종 때 예조참판 벼슬을 지낸 김광철의 옛집 터 애일은 효자애일(孝子愛日)의 준말로《증수임영지》애일당에 보면 강릉부 북촌 사천에 있으며 참판 김광철의 옛날 집이었다. 효자가 어버이를 섬길 날이 얼마 없어 세월의 흐름을 애석하게 여기며 어버이를 모실 수 있는 하루하루를 아낀다는 뜻에서 따온 것이다. 그 후 마을 이름을 애일이라 지어 불렀으니, 그는 조선의 문장가인 초당 허엽의 장인이고, 허봉. 허난설헌. 허균의 외할아버지다. 교산(蛟山)- 애일당 뒤에 있는 산줄기. 이 산줄기의 형국이 도룡뇽이 누워있는 형국이어서 생긴 이름이다. 교산은 애일당의 외손이며,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소설《홍길동전洪吉童傳》을 쓴 허균의 호다. 하평리 마을 뒷산에는 전국시가비 건립동호회에서 세운 교산 시비가 있다.《증수임영지》에 보면 이설당은 애일당 서쪽에 있으며, 판서 김광진이 벼슬에서 물러나 한적하게 쉬던 별장이었다. 라고 기록되었다.

 

『사천면지(沙川面誌)』에 의하면 “애일당 터는 매봉산에서 낙맥하여 사화진(沙火津)에서 끝난다, 용이 끝 맺힌 곳에서 역으로 거슬러 올라 서쪽으로 300m 지점에 애일당이 있고 애일당에서 서쪽으로 600m 올라와 이설당이 있다. 두 명당 터는 명지중에 명지”라고 하였습니다.

 

(6) 강릉시 발행『강릉의 문화유산(64쪽)』(1985, 1, 17)에는 “이광노 가옥(李光魯家屋) 문화재 자료 제59호 강릉시 초당동 475-3. 이 가옥은 정확한 건립연대는 알 수 없으나 조선 선조(宣祖) 때의 문신(文臣)인 허엽이 살던 곳으로 허난설헌(許蘭雪軒)이 태어난 곳이라 전한다”고 하였습니다.

 

(7) 강릉문화원 발행『임영문화(臨瀛文化)』 第32輯 138쪽에 “허엽은 현 강릉시 초당동에 기거하였는데 마을이 번성하자 그의 호를 붙여 ‘초당(草堂)’이라 칭하게 되었다고 한다.”고 했습니다.

 

(8) 『강릉고을 땅이름 유래』(김기설 지음 2008년 182쪽)  16, 초당동 1) 초당이란 이름은 여러 가지가 전하는데, 조선조 때 교산 허균의 아버지 허엽이 이곳에 살면서 붙인 이름이라 하고, 또 이곳에 사는 강릉최들은 최씨들의 집 때문에 생긴 이름이라고도 한다. 그 외 허균. 허난설헌의 생가 등이 있다.

 

(9) 포천문화원 『포천을 빛낸 인물연구』 제17집. 2022 학술연구발표회(강남대 홍순석 명예교수)에서 “초당 허엽의 생애. 초당 허엽의 가문과 배경. 허엽은 양천허씨(陽川許氏) 허추(許樞) 계열의 후손으로 강릉의 입향조이기도 하다. 허엽(許曄1517~1580)은 1546년(명종1) 30세에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하여 조 중기의 관료이며, 학자이며, 문인이자 성리학자이다, 자는 태휘(太輝), 호는 초당(草堂),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나식(羅湜). 이여(李畬). 서경덕(徐敬德).이황(李滉)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이언적(李彦迪)을 사숙하였다. 사헌부 장령(掌令:조선시대 정4품 벼슬))으로 재직중 종가에 화재가 나서 소실되자 이를 다시 짓기 위하여 황해도 만호에게 재목을 수송해 오도록 한 것이 문제가 되어 벼슬자리에서 물러나 처가가 있는 강릉으로 내려와 머물렸다,고 했다. 처가가 있는 강릉에 낙향하였을 때 초당 두부를 상품화하여 선비로서 장사를 한다는 비난 받기도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넷째, 신봉승 및 지역 민속학자가 저서에서 밝힌 내용

 

(1) 역사가 지식이다' 라고 한 신봉승 작가 저서 『신봉승의 조선사 나들이』에서는 난설헌이 강원도 강릉시 초당동에서 허엽의 셋째 따님으로(명종 18년) 태어났다고 하였습니다.

 

(2) 『허난설헌 평전』(장정룡 교수 지음, 새문사, 2007, 17쪽)에서 “우복 정경세 강릉부사의 언급처럼 글을 숭상한 ‘문헌의 고장’ 강릉 초당에서 태어난 허난설헌은 허씨5문장가라 불리는 아버지 초당 허엽(許曄, 1517~1580)과 강릉 김씨 어머니의 따뜻하고 엄한 가정교육, 오빠 허성과 허봉의 가르침, 동생 허균의 뛰어난 시창작력와 감별력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하였으며 20쪽에서 “난설헌은 강릉 초당에서 살다가 어린 나이에 김씨 집안으로 시집갔다”고 하였고, 36쪽에서 “작은 형과 난설헌도 또한 임영(臨瀛, 강릉의 별칭)에서 태어났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제2장 허난설헌의 생애사. 제1절 희망의 유년기(1세~7세, 1563~1569)에서 허난설헌(許蘭雪軒)은 1563년 강릉 초당의 명문집안에서 태어났다. 허난설헌 가문의 학문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일찍이 중국까지 소문이 났는데 후대에 이름을 짓기를 ‘허씨5문장가’라 하였다. 제6장 허난설헌생애연보에서 “1세(1563, 명종18년) 허난설헌은 강릉 초당 생가에서 초당 허엽의 삼남 삼녀 중 셋째딸로 태어났다. 난설헌이 쓴 죽지사에 집은 강릉땅 돌 쌓인 갯가에 있어, 문 앞 강물에 비단옷을 빨았다오(家住江陵積石磯 門前流水浣羅衣)라고 하였는데, 자신의 고향 경포호수 인근 냇가가 있는 초당풍경이 연상된다.”고 하였습니다.

 

(3) 『강원도 민속연구』(장정룡, 국학자료원, 2002, 908쪽)에 “허균은 외조부 애일당 김광철(金光轍, 1488~1550)이 살던 사천에서 태어나 초당에서 자란 교산은 아버지를 따라 유성룡, 노수신 등 재상과 이순신, 원전 등 장군들이 살고 있는 서울 건천동에서 살다가 1577년 8세 때 상곡(명례방)으로 이사 갔다. 교산은 고향 강릉 사천과 초당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가졌는데 지사촌(至沙村:사촌에 이르러)에서 “걸음이 사촌에 이르니, 갑자기 얼굴이 환해져라, 주인이 돌아올 날을, 교산은 여태 기다리고 있었지”라고 읊었고 허균의『교산억기시(蛟山臆記詩)』의 강성자(江城子)와 교산이 27세인 1595년 소금강으로 입산하는 양비로(강릉부사 봉래 양사언의 아들)를 전송하며 경포호와 초당을 그리워한 시가 전합니다. 또한『임영문화(臨瀛文化)』(34輯 156쪽)에서는 “균가강릉, 강릉고명주야. 재오대산하. 삼한십이동천. 차위제이동천.(筠家江陵, 江陵古溟州也. 在五臺山下. 三韓十二洞天. 此爲第二洞天)균의 집은 강릉이다. 강릉은 옛 명주로 오대산 아래에 있다. 삼한에는 12동천이 있는데 이곳은 그 두 번째 동천이 되었다, 고 하였는데, 동천은 산천으로 둘러싸인 경치 좋은 곳으로 조선시대에는 열두 곳의 좋은 명승지가 있는데 강릉경관이 그 둘째에 속했다는 것이다. 옛날부터 전해오는 말 가운데 ’동대문 밖은 강릉‘ 또는 ’강릉산수갑천하(江陵山水甲天下)라는 말들이 틀리지 않은 것처럼 허균은 강릉경관과 풍습, 미덕을 극찬하였습니다. 교산은 난리를 당했을 때나 벼슬길에서 멀어졌을 때 수구초심(首丘初心:고향을 그리워 하는 마음)하면서 고향 강릉으로 돌아와 초당과 사천에서 지냈으며 늘 이곳을 그리워하였다.(憶溟州:고향 명주를 그리워하며)”고 하였습니다

 

(4) 교산의 한시에는 부친 초당공(曄)이 머물러 살았으며, 자신이 어렸을 때 뛰어 놀았던 고향집 ‘강릉댁(江陵宅)’ ‘초당(草堂)’ 구업(舊業 옛 별장)‘’ ‘경포(鏡浦)’등이 자주 등장한다. (을병조천록)에 실린 시에서 ”옛 별장 강릉집 활짝 열린 곳(舊業江陵宅相開). 못가에 지은 여막 봉래산 옆이네(結廬湖岸近蓬萊)라 하여 경포호수 옆의 초당을 말하고 있다. 강릉을 상징하는 임영(臨瀛) 영주(瀛州)라는 지명과 동쪽 바닷가의 초당, 경포호의 옛 이름인 경호(鏡湖) 등 언급된〈강성자(江城子)〉라는 글이 전합니다.

또한 강성자〈江城子〉는 1595년에 쓴 시로서 소금강 청학산으로 입산하는 양비로를 전송하며 “저 멀리 상상하니 눈처럼 흰 파도, 응당 경포호와 통할 것이라. 임 그리는 내 천 방울 눈물 부쳐주어도, 그대는 초당 동쪽에 이르지 못하리”라고 한탄하였고, 〈우회〉에서는 “초당에 봄이 와도 돌아가지 못하는 이 신세”라고 하며 고향 강릉의 초당을 그리워하였습니다.

 

 

다섯째, 제10회 허균. 허난설헌 한. 중. 일 국제학술대회의 발표

 

2008년 9월 20일 강릉시청대회의실에서 열린 제10회『한. 중. 일 국제학술대회 학술발표집』49쪽 수록된 「허난설헌의 패미니즘 연구」(丁暻淑/강릉대학교 교수)에는 “초당의 두 번째 아내는 예조참판 김광철의 딸로 허봉과 허난설헌 그리고 막내 허균을 낳았다. 허난설헌은 이러한 집안의 딸로 강릉 초당에서 태어났다”고 했으며 허난설헌을 중심으로 하는 양계의 가족관계 생가 가족의 가족사에서 “조선이 낳은 천재 시인 허난설헌은 1563년(명종 18년) 강릉 초당에서 許曄(1517~1580). 字는 太煇, 號는 草堂)의 셋째 딸로 태어났다. 이름은 초희(楚姬)이고, 자는 경번(景樊), 난설헌(蘭雪軒)은 그의 호이다. 아버지 아들 딸 모두 문장에 뛰어나 5문장가의 집안이라 불렸다. 이 사실은 허균이 지은『성옹지소록(惺翁識小錄)』과『선조대왕수정실록(先祖大王修正實錄)』에 유성룡(柳成龍)이 ”허씨 문중에 어찌 이리 기재(奇才:아주 뛰어난 재주)가 많은가”라고 감탄하고 이러한 가족들의 문학에 대한 천부적인 재질과 다정다감한 형제에 그리고 경포호수와 동해바다를 옆에 끼고 해송 아름다운 초당의 맑은 바람이 허난설헌으로 하여금 어려서부터 억제하기 힘든 시괴(詩魂:시의 기이함)의 소유자로 만든 것이 아닌가 한다.” 고 하였습니다.

 

 

여섯째, 북한 『조선력사인물사화』 및 『강릉에만 있는 이야기』의 설명

 

(1)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조선력사인물사화』에는 “여류시인 허란설헌”의 고향을 강릉이라 표기하고 그는 1563년 강원도 강릉에서 출생하였다고 하였습니다.

 

(2) 민속학자 김기설 교수의 『강릉에만 있는 얘기』(민속원)에서는 “허씨 5문장. 허씨 5문장이란 조선조 중엽 강릉 초당에 살았던 이들 5부녀자는 모두 조선시대 학문에 뛰어난 재질을 가졌고 그 명성이 중국까지 알려지기도 했다. 한편 ‘초당 허허 말뚝’이라고 했다. 초당은 경포호 동쪽에 있는 마을로 허난설헌의 생가가 있는 곳이다. 옛날 이 마을에 사는 허씨 집안에서 상을 당했는데 상을 당하니 인근에 있는 친척도, 멀리 북쪽에서는 간성 현감까지 문상을 왔다. 현감은 날이 덥고 햇볕이 따갑게 비치니 일산(日傘:볕을 가리기 위한 큰 비단 양산)을 쓰고 와서 그 일산을 천광(穿壙)할 때는 장지에다 꽂아놓았다. 인부들이 땅을 파고 하관을 할려고 하니 마을 사람들이 물을 주지 않아 물 대신 막걸리로 흙을 개서 바르고 봉분을 올렸다. 천광을 마치고 하산할 때 땅에 꽂았던 일산을 걷고 현감은 떠났다. 이때 햇볕을 피하기 위해 꽂아놓은 일산을 말뚝이라 했다. 초당에 사는 허씨들의 세도가 간성까지 뻗칠 정도로 대단했는데 그래서 간성 현감이 장례에 왔다고 한다” 고 하였습니다.

 

 

일곱째, 강릉시 여성단체협의회의 난설헌허초희 시비건립 성금모금운동

 

강릉시 여성단체협의회는 조선시대를 대표한 여류시인 난설헌 허초희는 예향의 고장인 강릉시 초당동에서 태어나 동양삼국에 그 천재적인 명성을 떨친 분이기에 우리들의 가슴에 보옥으로 간직되어 마땅하다 하여 ‘난설헌시비건립’을 위한 언론기관의 적극적인홍보와 시민성금모금운동을 펴 29개 여성단체에서 시민성금 5,980천원과 한석용 강원도지사 부인10,000천원, 강릉시비7,000천원, 총76,480천원으로 난설헌시비(詩碑)를 건립하였습니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장 권순형 교수가 찬란한 동해바다에서 솟아오르는 태양(蘭雪軒)을 기획하여 타일로 시설하여 1991년부터(난설헌 기일 음, 3, 19) 난설헌을 기리기 위한 헌다례를 시비공원에서 올려 오다가 2009년 9월 19일 난설헌 영정을 생가 안채에 봉안하고부터 생가에서 강릉시 24개 여성단체에서 헌다례를 올리고 있습니다.

 

 

여덟째, 초당 토지소유자 이광노 교수와 초당공

 

(1) 이광노 서울대 명예교수(당시 서울시 건축분과 문화재위원)는 필자가 초당동장(1997~2001) 재임 시 집 앞 개울가 바위돌을 허난설헌이 빨래하던 돌이라고 하고 허씨문중에서 소유토지를 매입의견을 제시하여 당시 시장에게 허균. 허난설헌 유적공원조성을 건의하였고, 강릉대 장정룡 교수는 교산 난설헌 학 세미나발표시 이광노 교수 소유토지를 강릉시에서 매입하여 두 분을 위한 공원화를 제안하였습니다. 그 후 강릉시에서 ‘강릉시민 의견수렴’과 ‘강릉시 시정조정위원회’를 거쳐 강릉시 의회 승인을 받아 57필지 109,901㎡(33,245평)를 4,637,925,870원에 3년 균분 상환조건으로 매입하였으며 날로 생가를 찾는 방문객이 늘어나 2008년 초당동 476의 6번지 건물 8동과 토지 5,015㎡ 매입하여 주차장 등 시설하였습니다.

 

(2) 초당공은 시강원필선(侍講院弼善)을 지내고, 이듬해 성균관 대사성에 올랐으며, 1562년(명종 17)에 참찬관이 되어 경연에 참석하여 조광조의 신원(伸寃)을 청하고 구수담의 무죄를 논한 사건으로 파직되었습니다. 이듬해 삼척부사로 복직되었다가 과격한 언사로 인해 하직하고, 1568년(선조 1)에 다시 기용되어 진하부사(進賀副使)로 명나라 사신으로 다녀와 대사간에 올랐습니다. 그 후 부제학을 거쳐 경상도 관찰사에 임명되어 경주부윤이 옥산서원을 세우겠다고 신청하여 재물을 후원하였으며 경주 옥산서원기(玉山書院記)를 친필로 써주었으며 2019년 7월 6일 제43차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위원에서 16~17세기에 건립된 다른 8개 서원과 함께 한국의 14번째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그 후 병으로 사직하고 돌아오는 길에 상주의 객관(客館)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초당공은 시재(詩才)와 문장력이 뛰어나 아들 허성(許筬). 허봉(許篈). 허균(許筠). 딸 허난설헌(蘭雪軒)과 함께 ‘허씨 5문장가(아버지, 아들, 딸 모두 글을 뛰어나게 잘 짓는 사람의 집안)’로 명성을 날렸다. 슬하에 3남 3녀를 두었습니다. 청주한씨 숙창(淑昌)의 딸과 결혼하여 전함사별제(典艦司別提) 박순원(朴舜元)과 퇴계의 문하로 수원현감(水原縣監)우성전(禹性傳)에게 시집간 두 딸과 장남 성(筬)을 낳았으며, 청주한씨와 사별한 후 강릉김씨 광철(光轍)의 딸과 결혼하여 봉(篈)·난설헌(蘭雪軒)·균(筠)을 낳았습니다. 특히 김씨 소생의 3남매는 뛰어난 문학적 재능으로 큰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리하여 실록의 사평(史評)에 “허엽의 세 아들인 성·봉·균과 사위인 우성전·김성립(金誠立)은 모두 문사로 조정에 올라 논의하여 서로의 수준을 높였기 때문에 세상에서 ‘허씨가 당파의 가문 중에 가장 치성하다’고 일컬었다”고 기록될 정도였습니다. 인격과 행실도 여러 사람에게 칭송을 받아 동인의 영수에 이르렀고 김정국이 찬수한『경민편』을 보충하여 반포하고『삼강이륜행실』의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개성 화곡서원(花谷書院)에 배향되었습니다.

 

2024(갑진년) 12월

양천허씨초당공파종회

회장 12대손 허세광 근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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