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숙공 허엽과 초당의 역사
문숙공 허엽(文肅公 許曄)과 초당(草堂)의 역사
초당(草堂) 허엽(1517∼1580) 공은 시조(始祖) 선문(宣文)의 20세손입니다. 양천허씨의 강릉 입향조는 허엽 공으로서, 자는 태휘(太輝)이고, 호는 초당(草堂),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공은 서경덕의 문인으로 1540년(중종 35) 진사시에 입격하고, 1546년(명종 1)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1551년(명종 6)에 홍문관 부교리를 거쳐 사가독서(賜暇讀書)1)한 뒤 장령으로 있을 때 종가(宗家)가 불이 타자 이를 다시 짓기 위해 황해도 만호(萬戶)에게 재목을 수송해 오도록 한 것이 문제가 되어 벼슬자리에서 물러나 그때 처가가 있는 강릉으로 내려왔습니다.2) 그 후 강릉시 초당동에 기거하였는데, 마을이 번성하자 그의 호를 붙여 ‘초당(草堂)’이라 칭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다음과 같은 학술적 근거를 제시한다.
첫째, 교산・난설헌을 비롯하여 가족사에 대한 기록을 남겼을 것으로 판단되나 임진왜란의 역사적 변환기와 난리를 겪었고, 수 세기 동안의 세월이 흐르면서 문헌이 소실(消失)된 것으로 선대로부터 전해오는 구전(口傳) 등에 의해 입증한다.
(1) 강릉시 사천면 판교리에서 선대로부터 10대를 살아온 후손 허연(당시 78세)은 1969년 5월 2일 『중앙일보』(제1122호) 권혁룡 기자가 자택을 찾아와 ‘때 묻은 고서(古書)’를 열람하던 중 허난설헌이 8세 때 쓴 <광한전백옥루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樑文)>을 보고 탄생지 물음에 초당동 이광로 교수 소유 집에서 출생하였다고 지목하자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1589) 生家 발견 -강릉시 초당동의 고가(江陵市 草堂洞 古家) 난설헌(蘭雪軒)의 시(詩)와 일치돼” 라는 기사(記事)를 냈는데, 후손이 증언(證言)하여 언론에 발표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2) 허미자 교수의 『허난설헌 연구(許蘭雪軒 硏究)』(성신여자대학교출판부 발행, 1984) 25쪽에 의하면 난설헌은 강릉 초당리(草堂里)에 있는 집에서 1563년에 태어났다. 그는 유복한 집안에서 자랐으며 특히 글재주가 뛰어나 8세에 <광한전백옥루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樑文)>을 지은 뒤 여신동(女神童)이라고까지 불렸다. 여성들에게는 글을 가르쳐 주지 않던 시대였지만 하곡(荷谷) 허봉(許篈)은 누이 난설헌을 자기의 글 벗인 손곡(蓀谷) 이달(李達)에게 나아가 시를 배우도록 해주었다고 한다. 이런 가정환경에서 자라난 난설헌은 14세쯤에 김성립(金誠立)과 결혼하였다. 안동김씨 집안인 시댁은 5대나 계속 문과에 급제한 문벌이었다.
(3) 국립중앙도서관목록(CIP) 『허난설헌』(허미자 지음, 성신여자대학교 출판부 발행)의 27쪽 ‘생애와 학문’. 난설헌은 강릉 초당리(草堂里)에 있는 집에서 1563년에 태어났다. 난설헌(1563∼1589)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문집을 간행한 여성 시인이다. 난설헌은 여성이 한시를 지었다는 사실 때문에 살아생전에 이미 구설수에 올랐으므로, 세상을 떠나며 “내 시를 다 불태우라”고 유언하였다. 그러나 허균은 누이의 시를 후세에 전해 평가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으므로, 기억하고 있던 시와 친정에 전하던 유고를 편집하여 중국 문인들에게 전하였다.
(4) 『韓國女性文學硏究』(許米子 著, 태학사)에는 11대 후손 난설헌은 강릉 초당리(草堂里)에 있는 집에서 1563년에 태어났다. 그가 어렸을 때 아버지와 오라버니들의 벼슬길은 순탄하였다. 머리말에서 조선조의 여성들은 5백년 동안 유교적 봉건체제와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제도 아래에서 한 인간으로서의 권리와 사회적 지위를 누리지 못하였다. 이러한 남존여비사상은 여필종부(女必從夫)라든가 삼종지도(三從之道)라는 엄격한 사회규범을 제도화하겠끔 만들었고, 오로지 여성은 집안일에 대해서만 논의하도록 만들었다.
(5) 『양천허씨실록(陽川許氏實錄)』 367쪽에는 “21世 초희(楚姬) 1563(명종 18) ∼1589년(선조 22), 난설헌은 강릉시 초당동 475의 3번지에서 태어나 7세 무렵까지 살면서 이웃 사천면 하평리 외가(외조부, 예조참판 김광철)를 오가며 유년기를 보냈고 15세에 시집갈 때까지 문학의 수학기를 거쳤다.”고 하였다.
(6) 『양천허씨세고(陽川許氏世稿)』(上) 372쪽에는 “강릉시 초당동 허난설헌 탄생지인 475번지의 3호임을 밝혀 둔다”고 하였다.
(7) 『허씨 오문장가 한시 국역집(許氏 五文章家 漢詩 國譯集)』(강릉시 발행, 2000)의 허초희의 생애와 한시(179쪽)에서 “허부인은 강릉 초당에서 태어나 아버지 허엽, 동생 허균과 함께 7세 무렵까지 살면서 유년기를 보냈고 15세에 시집갈 때까지 문학의 수학기를 거쳤다. 허부인의 당호인 난설헌의 의미는 여성의 미덕을 찬미하는 ‘난혜지질(蘭惠之質)’에서 ‘난’자를 따왔고, 눈 ‘설’자는 여성의 뛰어난 문학적 재능을 유서재(柳絮才)라 하고, 그 버들개지를 눈에 비유하여 서설(絮雪, 눈송이처럼 하얗게 날리는 버들강아지)이라고도 하므로, 지혜롭고 문학적 재능을 지닌 여성, 여성으로서 고결하고도 뛰어난 문재(文才, 글재주)를 지녔음을 암시한다.”고 언급하였습니다.
둘째, 교산(筠)의 『학산초담(鶴山樵談)』에 밝힌 문헌적 근거
(1) 임진왜란 때 강릉 외가에 머무르던 교산 허균이 25세 때 편찬한 최초의 시문집인 『학산초담(鶴山樵談, 청학산의 나무꾼 이야기)』에서 “작은 형과 난설헌도 또한 임영(臨瀛, 강릉) 땅 강릉의 정기를 받고 태어났음”을 밝혔다. “중씨여난설 적가위잉정어임영의(仲氏與蘭雪 赤可謂孕精於臨瀛矣)”라 하여 자신을 포함하여 세 형제의 고향이 고려 때부터 임영이라 불린 강릉임을 자랑스럽게 밝혔다. 하곡 허봉, 난설헌 허초희, 교산 허균은 동복(同腹, 한 어머니에게서 난 형제)으로, 어머니 강릉김씨 애일당 김광철 공의 따님이라고 하였다.
(2) “미숙 학사(美叔學士, 허봉)의 시를 읽으면 공중에 흩날리는 꽃을 보는 것 같다. 중씨가 불행히 일찍 죽어 원대한 포부를 제대로 펴보지 못했고, 남긴 글마저 흩어져 미처 수습하지 못했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찾아낼 겨를도 없이 다 병화(兵火)에 타버렸으니, 죽어도 잊지 못할 슬픔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내가 경호(鏡湖, 경포호수) 동편에 살 때에 놀라움이 우선 가라앉자, 일찍이 외던 것을 생각해 내어 보니 겨우 5백여 편이라, 베껴서 세상에 전하여 사라지지 않도록 기대하고자 한다. 그러나 다만 태산(泰山, 높고 큰 산)의 일호(一毫, 한 가닥의 털)일 뿐이다.”라고 하였다(『허균전집』1, 학산초담 31쪽).
(3) 허부인 난설헌은 강릉 초당에서 아버지 허엽과 함께 살았다. 허균의 『을병조천록』에 의하면, 고향과 관련 표현은 약 100여 수의 시편에서 찾아진다. 고향 강릉을 뜻하는 “향(鄕, 곳)이 들어간 표현”은 ‘향심(鄕心, 시골 생각)’・‘향산(鄕山, 시골 좋은 고장)’・‘고향(故鄕, 태어나 자란 곳)’・‘오향(吾鄕, 나의 고향)’・‘구향(舊鄕, 옛날 고향)’・‘환향(還鄕, 고향으로 돌아오다)’・‘향심(鄕心, 고향 생각)’・‘향관(鄕關, 고향의 관문)’・‘향몽(鄕夢, 고향을 그리워하여 꾸는 꿈)’ 등이 있으며, “지역을 표현”한 것은 ‘영동(嶺東, 대관령 동쪽에 있는 지방)’・‘관동(關東, 강원도 땅)’・‘감호(鑑湖, 경포호)’・‘고향월(故鄕月, 고향 달)’・’관동구업(關東舊業, 강릉에 있는 자신의 집)’・‘구업 강릉댁(舊業江陵宅, 옛집 별장 강릉집)’・‘감호구댁(鑑湖舊宅, 경포호 옛집)’이 있으며, “고향의 간접 표현”은 ‘고원(故園, 옛날 살던 동산)’・‘고려(故廬, 예전에 살던 집)’・‘구업(舊業, 오래된 옛집)’・‘가산(家山, 고향 산천)’・‘강릉댁(江陵宅)’・‘애일당’‘이설당’・‘초당’ 등을 썼다. 강릉은 어머니 품과 같은 곳이었고, 시심(詩心)의 원천이기도 하였다고 하였다. 자신의 고향을 자랑스럽게 명주(溟州, 지금의 강릉)라고 밝혔으며, 기행시집인 『을병조천록』에서도 그의 강릉에 대한 애정과 사향(思鄕, 고향을 생각함)의 정(情)을 곳곳에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은근히 독자들에게 알려 주었다.
(4) 교산의 한시에는 부친 초당공(許曄)이 머물러 살았으며, 자신이 어렸을 때 뛰어놀았던 고향집 ‘강릉댁(江陵宅)’・‘초당(草堂) 구업(舊業, 옛 별장)’・‘경포(鏡浦)’ 등이 자주 등장한다. 『을병조천록』에 실린 시에서 “옛 별장 강릉집 활짝 열린 곳[구업강릉댁상개(舊業江陵宅相開)], 못가에 지은 여막 봉래산 옆이네[결려호안근봉래(結廬湖岸近蓬萊)]”라 하여 경포호수 옆의 초당을 말하고 있다. 강릉을 상징하는 임영(臨瀛)・영주(瀛州)라는 지명과 동쪽 바닷가의 초당, 경호(鏡湖)를 ‘감호(鑑湖)’라고 한 것 등이 언급된 <강성자(江城子)>라는 글이 전한다. 또한 <청학산에 들어가는 양비로를 전송하다[送楊毗盧入靑鶴山]>에서는 “저 멀리 상상하니 눈처럼 흰 파도, 응당 경포호와 통할 것이라. 임 그리는 내 천 방울 눈물 부쳐주어도, 그대는 초당 동쪽에 이르지 못하리”라고 한탄하였고, <우회(寓懷)>에서는 “초당에 봄이 와도 돌아가지 못하는 이 신세”라고 하며 고향 강릉의 초당을 그리워하였다.
셋째, 강릉고적보존회, 문화재청, 강릉시, 강릉문화원 등의 저서에 허난설헌과 관련한 내용.
(1) 난설헌이 고향 강릉으로 오기 위해 동생 허균과 넘던 <대관령(大關嶺)>(1788, 단원 김홍도 그림)과 난설헌의 <애일당(愛日堂)> 시는 현재 전하지 않으나, 강릉고적보존회(江陵古蹟保存會)가 소화 8년(1933) 당시 강릉군수 다키자와 마코도(瀧澤誠)에 의해 편찬된 『증수 임영지(增修臨瀛誌)』에 “그가 남긴 난설헌집이 간행되어 세상에 전한다[성행소저유난설헌행우세(成行所著有蘭雪軒集行于世)]”고 하였다.
(2) 『강릉시사(江陵市史)』上(1087쪽). 제2장 허난설헌 조선이 낳은 천재 시인 “허난설헌은 명종(明宗) 18년(1563) 초당동에서 허엽(1517∼1580)[자(字)는 태휘(太煇), 호(號)는 초당(草堂)]의 셋째 딸로 태어났다. 이름은 초희이고, 자(字)는 경번(景樊), 난설헌은 그의 호(號)이다. 아버지 허엽은 조선조 기(氣)철학을 대표하는 서경덕(1489∼1546)[자(字)는 가구(可久). 호는 화담(花潭)]의 제자로, 일찍이 성균관 대사성, 대사헌, 홍문관 부제학, 경주부윤, 경상도 관찰사 등을 역임한 바 있는 학계의 대표적 유학자였다”라고 하였다.
(3) 『江陵年鑑(강릉연감)』(1990) 461쪽 강릉의 문화재 13) 이광로 가옥(李光魯 家屋)은 강릉시 초당동 3통 2반 소유자 이광로(李光魯). 조선 선조 때의 문신 초당 허엽이 살던 고가(古家)로 허난설헌(허난설헌(許蘭雪軒, 문화재자료 제59호 구조형식 목조와가(木造瓦家) ‘미음(ㅁ)’자형(字形), 소재의 생가라 전(傳)한다. 그 후 집주인이 여러 번 바뀌었으며, 1968년 현 소유주가 매입(買入)한 것이다. 집의 구조는 집 전면(全面)에 행량 1동(棟)을 배치(配置)하고 마당을 두고 ‘ㅁ’자형(字形) 본채가 있다. 본채는 다시 두 대문을 두어 사랑채와 안채로 구분(區分)하고 그사이에 광을 배치(配置)하여, 전체가 ‘ㅁ’자형이 되도록 한다.고 하였다.
(4) 문화재청과 강릉시・강릉대 박물관에서 1995년 펴낸 『강릉의 역사와 문화유산』 472쪽에는 강릉시 초당동 이광로 가옥에 대하여 “조선시대 대표적인 여류시인 허난설헌(1563∼1569)이 태어난 곳으로 전해지며 건립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다”고 하였으며, 같은 책 초당동 동제 575쪽에서 “초당동 지명은 조선조 광해군 때 홍길동전의 저자인 허균의 부친 초당 허엽 선생이 이곳에 살면서 붙였다고도 하고, 강릉최씨들의 초당이라는 뜻이라고도 말한다.”고 하였다. 또한 연화부수형 초당(588쪽), 초당동의 풍수 전설에 의하면 “옛날에 허균 생가 그 터가 좋다 하는데 초당하면 그 집터에 제일 부자가 살았어요. 배다리 이씨 양반이 선교장 밑에 산꼭대기에 올라서서 저 아래 초당 아모야 집이 요번에야 물이 틀림없이 들었겠지했는데 소문을 들으니 마당에도 물이 안 들어왔다는 게야. “아차 저기가 연터구나, 저기는 뜨는 터로구나” 말이야. 근데 마당에 물이 안들어왔으니 그걸 연화부수형이구나 했던 거요. 그 집터 좋다는 기 강릉에 소문이 났단 말이야.”라고 하여 초당의 명당터에서 난설헌 같은 천재 여류시인이 탄생하였다는 것을 거증(擧證)하였다.
(5) 박도식 교수의 『강릉동족(同族)마을』(강릉문화원 발행) 589쪽에는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1589) 본명은 초희(楚姬), 자는 경번(景樊)으로 강릉시 초당동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진다. 일찍이 허씨가문과 친교가 있었던 이달(李達)에게 시를 배워 천재적인 시재(詩才, 시를 짓는 재주)를 발휘하여 조선시대 최고의 여류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고 하였다.
(6) 강릉시 발행(1985, 1, 17) 『강릉의 문화유산』 64쪽에는 “이광로 가옥(李光魯 家屋) 문화재자료 제59호 강릉시 초당동 475의 3번지 이 가옥은 정확한 건립연대는 알 수 없으나 조선 선조(宣祖) 때의 문신(文臣)인 허엽이 살던 곳으로 허난설헌(許蘭雪軒)이 태어난 곳이라 전한다”고 하였다.
(7) 강릉문화원 발행 『임영문화(臨瀛文化)』 제32집 138쪽에 “허엽은 현 강릉시 초당동에 기거하였는데 마을이 번성하자 그의 호를 붙여 ‘초당(草堂)’이라 칭하게 되었다고 한다.”고 했다.
(8) 김기설 교수의 『강릉고을 땅이름 유래』 182쪽에서는 초당이란 이름은 여러 가지가 전하는데, 조선조 때 교산 허균의 아버지 허엽이 이곳에 살면서 붙인 이름이라 하고, 또 이곳에 사는 강릉최들은 최씨들의 집 때문에 생긴 이름이라고도 한다. 그 외 허균. 허난설헌의 생가 등이 있다.
(9) 포천문화원 발행 『포천을 빛낸 인물연구』 제17집 학술연구발표회(강남대 홍순석 명예교수)에서 “초당 허엽의 생애. 초당 허엽의 가문과 배경. 허엽은 양천허씨(陽川許氏) 허추(許樞, 판도좌랑공) 계열의 후손으로 강릉의 입향조이기도 하다. 허엽(許曄, 1517∼1580)은 1546년(명종1) 30세에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조선 중기의 관료이며, 학자이며, 문인이자 성리학자이다, 자는 태휘(太輝), 호는 초당(草堂),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나식(羅湜)・이여(李畬)・서경덕(徐敬德)・이황(李滉)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이언적(李彦迪)을 사숙(私塾, 직접적인 가르침을 받지는 않았으나 마음속으로 본받아서 도나 학문을 닦다)하였다. 사헌부 장령(掌令, 조선시대 정4품)으로 재직 중 종가에 화재가 나서 소실되자 이를 다시 짓기 위하여 황해도 만호에게 재목을 수송해 오도록 한 것이 문제가 되어 벼슬자리에서 물러나 처가가 있는 강릉으로 내려와 머물렸다,고 했다. 처가가 있는 강릉에 낙향하였을 때 초당 두부를 상품화하여 선비로서 장사를 한다는 비난 받기도 하였다”고 하였다.
(10) 『역사 속의 강원인물 그들이 꿈꾼 삶』(강원일보사) 129쪽에는 “1563년 강릉 초당 생가에서 초당 허엽의 3남 3녀 중 셋째 딸로 출생 1570년 <광한전백옥루상량문>을 지었으며 뒷날 213수의 주옥같은 시를 남겼다. 초희(楚姬), 예닐곱 살부터 여신동이라 불렸던 그는 옥혜라고도 불렸다. 허균・허난설헌 기념공원으로 조성된 이곳은 원래 난설헌의 생가다. 난설헌의 동생인 허균은 사천면 애일당에서 태어났다. 강릉 출신 천재 허난설헌(1563∼1589)은 그녀의 나이 여덟살 때 <광한전백옥루샹량문>을 지어 주위의 사람들을 놀라게 할 만큼 비범한 인물이었다.”고 했다.
넷째, 신봉승 및 지역 민속학자가 저서에서 밝힌 내용
(1) “역사가 지식이다”라고 한 신봉승 작가 저서 『신봉승의 조선사 나들이』에서는 난설헌이 강원도 강릉시 초당동에서 허엽의 셋째 따님으로(명종 18, 1563) 태어났다고 하였다.
(2) 『허난설헌 평전』(장정룡 교수, 새문사) 17쪽에서 “우복 정경세 강릉부사의 언급처럼 글을 숭상한 ‘문헌의 고장’ 강릉 초당에서 태어난 허난설헌은 허씨5문장가라 불리는 아버지 초당 허엽(許曄, 1517∼1580)과 강릉 김씨 어머니의 따뜻하고 엄한 가정교육, 오빠 허성과 허봉의 가르침, 동생 허균의 뛰어난 시창작력와 감별력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하였으며, 같은 책 191쪽 5) 강릉팔명기 중 하나인 허난설헌의 생가. 경포호수의 동남쪽 호반에 울창한 초당 송림 속에 서향으로 강릉팔명기중(江陵八名基中) 하나로 손꼽는 연화형(蓮花形) 고가(강릉시 초당동 475-3번지)가 있다. 전해오는 애기로는 조선조 여류시인허난설헌의 생가(生家)라 한다. 근래에 와서 김씨, 최씨, 정씨로 주인이 바뀌어 오다가 1968년 이광로씨가 매입하여 주인이 되었다. 이 집터는 허난설헌 생부(生父) 허엽(許曄)이 처음 터를 잡고 살았다.”고 하였다.
20쪽에서 “난설헌은 강릉 초당에서 살다가 어린 나이에 김씨 집안으로 시집갔다”고 하였고, 36쪽에서 “작은 형과 난설헌도 또한 임영(臨瀛, 강릉의 별칭)에서 태어났다.”고 하였다. 그리고 “제2장 허난설헌의 생애사. 제1절 희망의 유년기(1세∼7세, 1563∼1569)에서 허난설헌(許蘭雪軒)은 1563년 강릉 초당의 명문 집안에서 태어났다.”고 하였다.
(3) 허난설헌 가문의 학문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일찍이 중국까지 소문이 났는데 후대에 이름을 짓기를 ‘허씨5문장가’라 하였다. 제6장 허난설헌생애연보에서 “1세(명종 18, 1563) 허난설헌은 강릉 초당 생가에서 초당 허엽의 3남 3녀 중 셋째딸로 태어났다. 난설헌이 쓴 <죽지사>에 “집은 강릉 땅 돌 쌓인 갯가에 있어, 문 앞 강물에 비단옷을 빨았다오[가주강릉적석기 문전류수완라의(家住江陵積石磯 門前流水浣羅衣)]”라고 하였는데, 자신의 고향 경포호수 인근 냇가가 있는 초당풍경이 연상된다.”고 하였다.
다섯째, 제10회 허균・허난설헌 한・중・일 국제학술대회의 발표
강릉시청 대회의실에서 열린 제10회 『한・중・일 국제학술대회(2008, 9, 20) 학술발표집』 49쪽 수록된 「허난설헌의 패미니즘 연구」(丁暻淑/강릉대학교 교수)에는 “초당의 두 번째 아내는 예조참판 김광철의 딸로 허봉과 허난설헌 그리고 막내 허균을 낳았다. 허난설헌은 이러한 집안의 딸로 강릉 초당에서 태어났다”고 했으며 허난설헌을 중심으로 하는 양계의 가족관계 생가 가족의 가족사에서 “조선이 낳은 천재 시인 허난설헌은 1563년(명종 18) 강릉 초당에서 허엽(許曄, 1517∼1580). 자(字)는 태휘(太煇), 호(號)는 초당(草堂)의 셋째 딸로 태어났다. 이름은 초희(楚姬)이고, 자는 경번(景樊), 난설헌(蘭雪軒)은 그의 호이다. 아버지 아들 딸 모두 문장에 뛰어나 5문장가의 집안이라 불렸다. 이 사실은 허균이 지은 『성옹지소록(惺翁識小錄)』과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에 유성룡(柳成龍)이 ”허씨 문중에 어찌 이리 기재(奇才, 아주 뛰어난 재주)가 많은가”라고 감탄하고 이러한 가족들의 문학에 대한 천부적인 재질과 다정다감한 형제에 그리고 경포호수와 동해바다를 옆에 끼고 해송 아름다운 초당의 맑은 바람이 허난설헌으로 하여금 어려서부터 억제하기 힘든 시괴(詩魂, 시의 기이함)의 소유자로 만든 것이 아닌가 한다.”고 하였다.
여섯째, 북한 『조선력사인물사화』 및 『강릉에만 있는 이야기』의 설명
(1)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조선력사인물사화』에는 “여류시인 허란설헌”의 고향을 강릉이라 표기하고 그는 1563년 강원도 강릉에서 출생하였다고 하였다.
(2) 민속학자 김기설 교수의 『강릉에만 있는 얘기』(민속원)에서는 “허씨 5문장. 허씨 5문장이란 조선조 중엽 강릉 초당에 살았던 이들 5부녀자는 모두 조선시대 학문에 뛰어난 재질을 가졌고 그 명성이 중국까지 알려지기도 했다. 한편 ‘초당 허허 말뚝’이라고 했다. 초당은 경포호 동쪽에 있는 마을로 허난설헌의 생가가 있는 곳이다. 옛날 이 마을에 사는 허씨 집안에서 상을 당했는데 상을 당하니 인근에 있는 친척도, 멀리 북쪽에서는 간성 현감까지 문상을 왔다. 현감은 날이 덥고 햇볕이 따갑게 비치니 일산(日傘, 볕을 가리기 위한 큰 비단 양산)을 쓰고 와서 그 일산을 천광(穿壙)할 때는 장지에다 꽂아놓았다. 인부들이 땅을 파고 하관을 할려고 하니 마을 사람들이 물을 주지 않아 물 대신 막걸리로 흙을 개서 바르고 봉분을 올렸다. 천광을 마치고 하산할 때 땅에 꽂았던 일산을 걷고 현감은 떠났다. 이때 햇볕을 피하기 위해 꽂아놓은 일산을 말뚝이라 했다. 초당에 사는 허씨들의 세도가 간성까지 뻗칠 정도로 대단했는데 그래서 간성 현감이 장례에 왔다고 한다”고 하였다.
(3) 『강원도 민속연구』(장정룡 교수, 국학자료원) 908쪽에 “허균은 외조부 애일당 김광철(金光轍, 1488∼1550)이 살던 사천에서 태어나 초당에서 자란 교산은 아버지를 따라 유성룡・노수신 등 재상과 이순신・원전 등 장군들이 살고 있는 서울 건천동에서 살다가 1577년 8세 때 상곡(庠谷) 명례방(明禮坊)으로 이사 갔다. 교산은 고향 강릉 사천과 초당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가졌는데 <사촌에 이르러[지사촌(至沙村)]>에서 “걸음이 사촌에 이르니, 갑자기 얼굴이 환해져라, 주인이 돌아올 날을, 교산은 여태 기다리고 있었지”라고 읊었고, 허균의 『교산억기시(蛟山臆記詩)』의 <강성자(江城子)>와 교산이 27세인 1595년 소금강으로 입산하는 양비로(강릉부사 봉래 양사언의 아들)를 전송하며 경포호와 초당을 그리워한 시가 전합니다. 또한 『임영문화(臨瀛文化)』 34輯, 156쪽에서는 “균가강릉 강릉고명주야 재오대산하 삼한십이동천 차위제이동천”(筠家江陵 江陵古溟州也 在五臺山下 三韓十二洞天 此爲第二洞天) 균의 집은 강릉이다.
강릉은 옛 명주로 오대산 아래에 있다. 삼한에는 12동천이 있는데 이곳은 그 두 번째 동천이 되었다고 하였는데, 동천은 산천으로 둘러싸인 경치 좋은 곳으로 조선시대에는 열두 곳의 좋은 명승지가 있는데 강릉경관이 그 둘째에 속했다는 것이다. 옛날부터 전해오는 말 가운데 ‘동대문 밖은 강릉’ 또는 ‘강릉산수갑천하(江陵山水甲天下)’라는 말들이 틀리지 않은 것처럼 허균은 강릉경관과 풍습, 미덕을 극찬하였습니다. 교산은 난리를 당했을 때나 벼슬길에서 멀어졌을 때 수구초심(首丘初心, 고향을 그리워 하는 마음)하면서 고향 강릉으로 돌아와 초당과 사천에서 지냈으며 늘 이곳을 그리워하였다[憶溟州, 고향 명주를 그리워하며]”고 하였다.
(4) 강릉시 발행 『교산허균선생 문집』(국역본, 장정룡 교수) 허균선생의 연보에는 “1세(선조 2, 1569) 교산은 악록 허성, 하곡 허봉, 난설헌 허초희의 아우로 강릉 사천 애일당에서 태어난 후 초당에서 어머니와 함께 살다가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옮겨 건천동에서 자랐으며 9세 때(1577) 상곡 명례방(庠谷:明禮坊)으로 이사를 갔다.”고 하였다.
교산 허균은(1569∼1618) 자는 단보(端甫), 호는 교산(蛟山)・학산(鶴山)・성소(惺所)・백월거사(白月居士)로 강릉부 사천 외가 애일당(愛日堂)에서 태어났다. 허균의 외조부가 지은 애일당은 동쪽으로 대해(大海, 크고 넓은 바다)와 북쪽으로 오대산. 청학산. 보현산이 바라보이는 언덕 위에 있었다.
애일당 뒤에 있는 산등성이는 이무기가 기어가듯 꾸불꾸불한 모양을 이루고 있다고 해서 예로부터 교산(蛟山, 이무기 산)이라고 불러왔다. 허균이 자신의 호를 교산이라고 한 것도 그의 출생지와 관련하여 지은 것으로 생각한다고 했다.
(5) 강릉문화원 발행 『강릉고을 땅이름 유래』(김기설 교수 지음) 306쪽에는 “애일당(愛日堂) 터 솔마지(교산 허균의 시비가 있는 마을)에 있는 조선조 중종 때 예조참판 벼슬을 지낸 김광철의 옛집 터 애일은 효자애일(孝子愛日)의 준말로 『증수임영지』 애일당에 보면 강릉부 북촌 사천에 있으며 참판 김광철의 옛날 집이었다. 효자가 어버이를 섬길 날이 얼마 없어 세월의 흐름을 애석하게 여기며 어버이를 모실 수 있는 하루하루를 아낀다는 뜻에서 따온 것이다. 그 후 마을 이름을 애일이라 지어 불렀으니, 그는 조선의 문장가인 초당 허엽의 장인이고, 허봉. 허난설헌. 허균의 외할아버지다. 교산(蛟山)-애일당 뒤에 있는 산줄기. 이 산줄기의 형국이 도룡뇽이 누워있는 형국이어서 생긴 이름이다.
(6) 교산은 애일당의 외손이며,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소설 『홍길동전(洪吉童傳)』을 쓴 허균의 호다. 하평리 마을 뒷산에는 전국시가비 건립동호회에서 세운 교산 시비가 있다. 『증수 임영지』에 보면 이설당은 애일당 서쪽에 있으며, 판서 김광진이 벼슬에서 물러나 한적하게 쉬던 별장이었다.”라고 기록되었다.
(7) 『사천면지(沙川面誌)』에 의하면 “애일당 터는 매봉산에서 낙맥하여 사화진(沙火津:사천진리)에서 끝난다, 용이 끝 맺힌 곳(교문암)에서 역으로 거슬러 올라 서쪽으로 300m 지점에 애일당이 있고 애일당에서 서쪽으로 600m 올라와 이설당이 있다. 두 명당 터는 명지중에 명지”라고 하였다.
일곱째, 허난설헌 관련 수없는 기사 중 1976년 2월 28일 『강원일보』 제8469호 소개
土豪들의 住居(주거)생활. 옛 모습을 … 江陵에 대표적인 古家 8채 選定(선정)
土豪(토호:토호는 조선 전 시기에 걸쳐서 사용된 용어로 중앙 집권 국가를 지향한 조선에서 지방 수령을 포함한 국가 권력에 대립되었던 세력을 말한다).
댓골집:초당동 475-3번지 1천여평 대지에 지은 고가로 이조여류시인 허난설헌(許蘭雪軒)(『홍길동전』의 작자 교산 허균의 누님)의 생가-초당 노송밭에 자리잡은 고가의 집터가 영동의 8곳 명당 중의 하나. 30칸의 건물은 1968년 현 소유자인 이광로씨가 매입, 관리하고 있다. 허난설헌의 부친 초당허엽(草堂許曄)으로 부터 전해오는 명당의 집터는 연꽃 터 또는 열두대문집이라고 불러왔고 김씨, 최씨, 정씨로 주인이 바꿔왔는데 택호도 김씨일 때는 안초당댁, 최씨일 때는 최위관댁, 정씨가 주인일 때는 댁골집으로 바꿔 오늘에 이르기까지 댁골집으로 불러오고 있다고 하였다.
통천댁(선교장) 건평 318평에 세워진 99칸의 조선말 상류층의 전형적인 저택을 두 번째로 소개하였으며, 그다음으로 찰방댁 영동지방에서 가장 오래되었으며(조선 정조 때 병조정랑)이 1774년에 창건됐다. 기록에는 이 집을 지은 목수가 14년 후인 1788년에 오죽헌 어제각을 건축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러한 고가의 규모와 역사가 댓골댁보다 훨씬 뛰어나지만 댓골집을 가장 위에 가장 앞에 소개한 것은 ‘허난설헌’이라는 인물 때문이라도 본다.
여덟째, 허씨 오문장가 시비를 세우다.
1998년 12월 26일 강릉시와 예총 강릉지부는 ‘허씨 오문장’의 예술혼을 기리기 위한 문학산책로 조성사업을 시비 1억 원의 예산으로 초당동 마을 입구에서 생가 앞까지 ‘천지인일월 인위만물령(天地人日月 人爲萬物靈)’ 해・달(천년의 거울)・새싹(사물의 근원)・잉태와 구름(새 생명과 자연) 우주 만물의 연장이라는 생성의 원리에 따라 성장하고 변화한다는 조화로운 의미를 담아 관동대학교 미술학과 최종림 교수의 기획한 작품으로 심기섭 강릉시장, 신봉승 예술원회원, 엄창섭 박사 예총강릉지부회장, 조영수, 정태완, 최종림, 허세광, 심규만 추진위원을 구성하여 건립하였다가 ‘걷는 사람이 없고 차량 이동’에 따라 2013년 5월 생가 안 공원으로 이설 하였다.
아홉째, 강릉시 여성단체협의회의 난설헌허초희 시비건립성금모금운동
강릉시 여성단체협의회는 조선시대를 대표한 여류시인 난설헌 허초희는 예향의 고장인 강릉시 초당동에서 태어나 동양 삼국에 그 천재적인 명성을 떨친 분이기에 우리들의 가슴에 보옥으로 간직되어 마땅하다, 하여 ‘난설헌시비건립’을 위한 언론기관의 적극적인홍보와 시민성금모금운동을 펴 29개 여성단체에서 시민성금 5,980천원과 한석용 강원도지사 부인 10,000천원, 강릉시비 7,000천원, 총 76,480천원으로 김진선 강릉시장이 강원도 교육연수원입구 초당동 232평의 부지를 제공해 주어 난설헌시비(詩碑)를 건립하였습니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장 권순형 교수가 찬란한 동해바다에서 솟아오르는 태양(蘭雪軒의 꿈)을 기획하여 타일 작품을 일본에서 구워 시설하여 1991년부터(기일 음, 3, 19) 난설헌을 기리기 위한 헌다례를 시비공원에서 올려 오다가 2009년 9월 19일 난설헌 영정을 생가 안채에 봉안하고부터 생가에서 강릉시 24개 여성단체주관으로 기일(忌日)에 헌다례를 올리고 있다.
열 번째, 초당 토지소유자 이광노 교수와 초당공
(1) 이광로 서울대 명예교수(당시 서울시 건축분과 문화재위원)는 필자가 초당동장(1997∼2001) 재임 시 집 앞 개울가 바위돌을 허난설헌이 빨래하던 돌이라고 하고 허씨문중에서 소유토지를 매입의견을 제시하여 당시 시장에게 허균・허난설헌 유적공원조성을 건의하였고, 강릉대 장정룡 교수는 교산 난설헌 학술세미나발표시 이광로 교수 소유토지를 강릉시에서 매입하여 두 분을 위한 공원화를 제안하였습니다. 그 후 강릉시에서 ‘강릉시민 의견수렴’과 ‘강릉시 시정조정위원회’를 거쳐 강릉시의회 승인을 받아 2000년 2월 16일 『허균・허난설헌 유적지공원』 부지 매매계약을 체결하고 57필지 109,901㎡(33,245평)를 4,637,925,870원에 3년 균분 상환조건으로 매입하였으며 날로 생가를 찾는 방문객이 늘어나 2008년 초당동 476의 6번지 건물 8동과 토지 5,015㎡ 매입하여 주차장 등 시설하였다.
(2) 초당공은 시강원필선(侍講院弼善)을 지내고, 이듬해 성균관 대사성에 올랐으며, 1562년(명종 17)에 참찬관이 되어 경연에 참석하여 조광조의 신원(伸寃)을 청하고 구수담(具壽聃)의 무죄를 논한 사건으로 파직되었다. 이듬해 삼척부사로 복직되었다가 과격한 언사로 인해 하직하고, 1568년(선조 1)에 다시 기용되어 진하부사(進賀副使)로 명나라 사신으로 다녀와 대사간에 올랐다. 그 후 부제학을 거쳐 경상도 관찰사에 임명되어 경주부윤이 옥산서원을 세우겠다고 신청하여 재물을 후원하였으며 경주 옥산서원기(玉山書院記)를 지어 써주었으며 2019년 7월 6일 제43차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위원에서 16∼17세기에 건립된 다른 8개 서원과 함께 한국의 14번째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그 후 병으로 사직하고 돌아오는 길에 상주의 객관(客館)에서 생을 마감했다.
초당공은 시재(詩才, 시를 짓는 재주)와 문장력이 뛰어나 아들 허성(許筬)・허봉(許篈)・허균(許筠)・딸 허난설헌(蘭雪軒)과 함께 ‘허씨 5문장가(아버지, 아들, 딸 모두 글을 뛰어나게 잘 짓는 사람의 집안)’로 명성을 날렸다. 슬하에 3남 3녀를 두었다. 청주한씨 숙창(淑昌)의 딸과 결혼하여 전함사별제(典艦司別提) 박순원(朴舜元)과 퇴계의 문하로 수원현감(水原縣監)우성전(禹性傳)에게 시집간 두 딸과 장남 성(筬)을 낳았으며, 청주한씨와 사별한 후 강릉김씨 광철(光轍)의 딸과 결혼하여 봉(篈)·난설헌(蘭雪軒)·균(筠)을 낳았다.
특히 김씨 소생의 3남매는 뛰어난 문학적 재능으로 큰 명성을 얻었다. 그리하여 실록의 사평(史評)에 “허엽의 세 아들인 성·봉·균과 사위인 우성전・김성립(金誠立)은 모두 문사로 조정에 올라 논의하여 서로의 수준을 높였기 때문에 세상에서 ‘허씨가 당파의 가문 중에 가장 치성하다’고 일컬었다”고 기록될 정도였다. 인격과 행실도 여러 사람에게 칭송을 받아 동인의 영수에 이르렀고 김정국이 찬수한 『경민편(警民編)』을 보충하여 반포하고 『삼강이륜행실(三綱二倫行實)』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용인시 맹리 세장동(世藏洞) 초당공의 묘표 앞면은 양사언(楊士彦), 뒷면은 한호(韓濩)가 썼으며. 신도비문은 조선 중기의 문신 영의정 노수신(盧守愼)이 짓고 전액(篆額, 전서체로 쓴 머리글자)은 이조참판을 지낸 남응운(南應雲)이 썼으며, 비의 음기는 선조 때의 명필 성균진사(成均進士) 한호(韓濩)가 썼다.
이 비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0년 전인 만력(萬曆) 10년(壬午) 선조 15년(1582)에 세웠으며, 위패는 개성 화곡서원(花谷書院)에 배향되었습니다. 난설헌은 문장가이자 시인이요, 작가이며 서화가입니다.
2024 갑진년 12월 일
양천허씨 초당공파종회
회장 12대손 허세광 옮김
<註> |
1) 조선시대 젊고 유능한 문신에게 휴가를 주어 학문에 힘쓰도록 한 제도. 세종 때 집현전 학사들을 대상으로 처음 실시된 이후 개폐를 거듭하다가 정조 때 규장각의 설립과 함께 폐지되었다. 휴가 기간은 1개월에서 長暇라 하여 오랜 기간이 주어지기도 하였다. 대체로 6인 내외가 뽑혔다(金庠基, 1955 「讀書堂(湖堂)考」 『震檀學報』17;金重權, 1999 「中宗朝의 賜暇讀書에 關한 硏究-賜暇讀書者를 中心으로」 『書誌學硏究』18 참조).
2) 이에 대해 실록의 사평(史評)에는 “이감(李戡)은 허엽이 이조좌랑이 되었을 때에 자기를 천거해 주지 않은 것에 대해서 원망을 품었다. 그때 마침 허엽의 종가(宗家)가 불에 타서 다시 집을 짓게 되었는데, 이감은 의심스러운 흔적을 찾아내 허엽을 몰아붙였다”고 하였다(『명종실록』권15, 8년 9월 신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