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 혁
양천허씨 강릉 입향조(入鄕祖는 허엽(許曄)이다. 명종 8년(1553년) 장령으로 있을 때 종가(宗家)에 불이나 이를 다시 짓기 위해 황해도 만호(萬戶)에게 재목을 부탁한 것이 문제가 되어 그 자리에서 물러나 처가가 있는 강릉으로 내려왔다. 애일당(愛日堂) 처가에서 잠시 머물다가 산수가 수려하고 풍경이 좋은 연화부수지의 자리인 현 안초당(475-3번지) 전 이광노 교수가 살던 집터)에 거주하였다. 이곳에서 허난설헌이 태어났으며 주변에 콩이 많이 생산되어 이 콩으로 동해안의 청정 바닷물을 간수로 두부를 만들어 먹었던바 그 맛이 소문이 나서 마을이 번성하자 마을 이름을 허엽(許曄)의 호를 붙여 초당동이라고 칭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양천(陽川) 허씨는 양천의 토성(土姓)이다, 양천은 본래 고구려의 재차파 이현(齊次巴衣縣)이었는데, 신라 경덕왕 때 공암(孔巖)으로 고치어 율진군(栗津郡, 지금의 과천)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고려 현종 9년(1018)에 수주(樹州, 지금의 부평)에 속하였고, 충선왕 2년(1310)에 비로소 양천현이 되어 현령을 두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그대로 따랐으며, 고종 32년(1895)에 양천군이 되어 인천부의 관할이 되었다가 다음 해에 경기도에 속하였다,
그 뒤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 김포군에 편입되어 양동면과 양서면이 되었다.
1963년 2개면이 서울특별시로 편입되고, 1977년에 강서구가 신설되면서 강서구에 편입되었다가 1988년에 강서구에서 양천구가 분리, 신설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양천은 현재 가양동 지역을 추정된다.
양천허씨의 시조는 공암지방의 호족이었던 허선문(許宣文)이다. 그는 공암현(孔巖縣)에 세거하면서 농사를 많이 지었는데, 왕건이 견훤을 정벌하기 위하여 남쪽으로 행하던 중 군량미가 떨어져 위기에 처했을 때 왕건을 도와 후삼국통일에 지대한 공을 세우게 되었다,
이에 왕건은 선문(宣文)을 공암촌주(孔巖村主)로 봉하고, 공암현을 식읍(食邑)으로 하사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본관을 공암허씨로 하였고. 후에 공암(孔巖)이 양천(陽川)으로 개칭됨에 따라 양천허씨(陽川許氏)로 불러지게 되었다.
초당허엽(草堂許曄1517~1568)자는 태휘(太輝)이고, 호는 초당(草堂),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서경덕의 문인으로 중종 35(1540) 진사시에 입격하고, 명종 원년(1546)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명종 6년(1551)에 홍문관 부교리를 거쳐 명종 8년(1553)에 사가독서(賜暇讀書)한 뒤 사헌부 장령을 지냈고, 1559년 필선으로 서용되고 이듬해 대사성이 이르렀다.
1562년 지제교를 겸하였을 때 왕의 명을 받고 옥취정에 들어가 율시로 화답하였고, 이해 동부승지로 참찬관이 되어 경연에 참석하여 조광조의 신원(伸冤)을 청하고 구수담의 무죄를 논한 사건으로 파직되었다. 그 후 삼척부사로 서용되었고, 예. 공. 병. 이조좌랑과 이조정랑. 공. 예. 병. 이. 형조참의. 홍문관의 부수찬. 수찬. 교리. 부교리. 부제학. 시강원필선과 의정부의 검상과. 제용감부정과 군자감. 내자. 사도. 군기. 성균관의 전적. 직강. 사예. 승문원 판교와 승정원의 동부. 우부. 좌부. 우승지. 배천군수. 경주부윤. 선조 원년(1568)에 다시 기용되어 진하부사(進賀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대사간에 올랐다, 그 후 부제학을 거쳐 경상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초당공(草堂 許曄)은 말년에 경상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김정국(金正國)이 찬수한 경민론『警民論』을 보충하여 반포하고 삼강오륜행실도「三綱五倫行實圖」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초당공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면 종가를 향해 가서 사당에 재배하고 물러나와 거문고와 서책에 묻혀 거(居)하는 외에 고금의 격언을 써서 벽에 걸고 보며 반성하였다. 경상감사시절에 기록한〈옥산서원기〉친필에 경주부윤이 옥산서원을 세우겠다고 신청하여 재물을 후원하여 세웠다. 경주옥산서원은 2019년 7월 6일 제43차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위원회에서 16~17세기에 건립된 다른 8개 서원과 함께 역사적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아 한국의 서원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의 14번째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고, 개성의 화곡서원(花谷書院)에 배향되었다. 저서로『초당집(草堂集)』과『전언완행록(前言往行錄)등이 있다. 경상도관찰사재임 시 병으로 사직하고 돌아오는 길에 상주의 객관(客館)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허균은 여러 차례 시를 지으며 강릉 초당에, 경포호 옆에 시냇물과 솔숲을 끼고 있는 고향집을 그리워했다. 가선대부(종2품) 동지중추부사 벼슬을 받고 관직에 있던 사명당이 1603년 조정에서 물러나 상원사로 돌아왔다가, 마침 허균이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 강릉에 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초당으로 찾아왔다.
허균이 경포호에 있던 이 집을 감호서(鑑湖墅)라고 본인이 집이 경포호 옆이라고 표기했으니, 허균이 자신의 책을 강릉 선비들에게 공개하며 호서장서각(湖墅藏書閣)을 설치했던 바로 그 집이었다. 허균은 그 무렵 세상과 어울리지 못해 불경을 읽으며 위안을 받던 중이었으므로 불교의 명심견성설(明心見性說)을 질문했더니, 사명당이 알기 쉽게 설명했다. 고 한다.
허균은 이듬해(1604년)2월 강릉에서 사명당에게 편지를 보내 다시 벼슬하라고 권하였다.
중국 오명제가 남쪽 고향 회계(會稽)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시로 읊자 허균이 그 시에 차운하여 ‘차오자어선생남장귀흥(次吳子魚先生南庄歸興)’이라는 시를 지었는데, 제2수 첫 구에 “소나무 사립문 대나무 오솔길에 맑은 연기가 둘렸으니, 우리 집은 제2동천 명주에 있다오(松關竹徑帶晴烟, 家住溟州第二天.)”라고 했다. 오명제는 중국 독자들이 이 구절의 뜻을 제대로 모를까봐 “허균의 집은 강릉이다. 강릉은 옛날의 명주인데, 오대산 아래에 있다.
초당은 연화부수형의 명당길지로서 경포면이 1955년 9월 1일 강릉시가 되면서 개칭한 것이다, 조선 광해군때 초당 허엽이 현 안초당의 연화지 자리인 초당동465-3번지 지역에 거주하여 칭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곳은 이른바 허씨 5문장인 허엽을 위시하여 허난설헌과 허균이 머물던 곳이며 경포8경중의 하나인 초당취연(草堂炊煙)의 고장이다. 교산공(蛟山 許筠)이 쓴 鶴山樵談)에서 하곡 허봉과 난설헌이 강릉(臨瀛 강릉의 별칭)에서 태어났음을 밝혔으며 을병조천록(乙丙朝天錄)에 강릉 집 활짝 열린 곳(舊業江陵宅相開) 못가에 지은 여막 봉래산 옆이네 라고 했다. 교산의 시에는 강릉을 상징하는 임영(臨瀛)의 영주(瀛州)라는 지명과 동쪽 바닷가 초당, 경포호의 옛 이름인 경호(鏡湖) 등이 강성자라는 사(詞)가 전한다.
조선시대 초당에 천여평 대지를 가질만한 사대부는 초당선생 뿐이었다. 허균이 여러 차례 시를 지으며 강릉 초당에, 경포호 옆에 시냇물과 솔숲을 끼고 있는 고향집을 그리워했다.
1788년(정조 12)조선시대 맹지대가 엮은 증수 임영지(增修臨瀛誌 강릉의 역사와 인문지리 등 읍지)에『성행소저유난설헌집행간세(成行所著有蘭雪軒集行干世)』그가 남긴 난설헌 시집이 세상에 전한다. 하고 있다.
〖참고문헌〗증수임영지. 장정룡 교수 허난설헌평전. 박도식 교수 강릉의 동족마을. 허경진 교수의 초당문중과 강릉. 전,홍익대 최강현 교수 을병조천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