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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 지 공

승 지 공

ma05.png 양천허씨승지공 휘돈(hj-01.jpg)은 1625년(인조 3)~1703년(숙종 29)에 병과에 급제하였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세상을 등지고 고향 강릉으로 내려와 후학을 지도하였습니다. 79세의 일기로 생을 마치고 후에 좌승지(左承旨)로 추증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이조판서를 지낸 동강공 보(ma10.png)이고 어머니는 전의이씨(全義李氏)이며 배위는 강릉김씨(江陵金氏) 풍천임씨(豐川任氏)두 분입니다.

 

승지공 휘돈(hj-01.jpg) 증조부 초당공(草堂公) 부자가 모두 문과에 급제하고 명나라 사신으로 다녀온 문중이 없었습니다, 초당공(草堂 曄)과 세 아들 악록(岳麓) 허성(許誠), 하곡(荷谷) 허봉(許篈), 교산(蛟山) 허균(許筠)과 딸 난설헌(蘭雪軒) 허초희(許楚姬)를 합하여 흔히 오문장가(五文章家)라고 하는데, 한 집안에서 다섯 문장가가 한꺼번에 나온 일이 없었으므로 칭찬한 말이다. 라고 한 표현은 허균의 ‘성옹지소록(惺翁識小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여자로 태어나 과거시험에 응시할 자격이 없었고 여자는 이름조차 가질 수 없었던 시대였습니다.

 

우리 선대부의 문장과 학문과 절행(節行)을 사림에서 높게 쳤습니다. 큰 형(岳麓 許誠)은 경전을 전해 받았고, 문장도 간략하면서 무게가 있었으며, 작은형(荷谷 許篈)은 학문이 넓고 문장도 매우 고고하여 근래에는 견줄 사람이 드물다고 했고, 누님 (난설헌 허초희)의 시는 더욱 맑으며 장하며 높고 고와서 개원(開元 당 현종의 연호),대력(大曆 당 대종의 연호)시대 사람들보다 뛰어났다는 명망이 중국까지 전파되어, 천신사부(薦紳士夫)가 모두 칭찬하였다고 하고 교산(蛟山)공께서도 나도 불초하나마 또한 가문의 명성을 떨어뜨리지 않아서 문예를 담론하는 사람 중에 이름이 들어가고, 중국 사람들에게도 제법 칭찬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양천허씨 5문장가 가운데 여성이어서 과거시험을 볼 수 없었던 난설헌 허초희 이외에는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4부자가 모두 왕의 교서를 짓는 4지제교(知製敎), 3형제가 모두 왕의 옆에서 역사를 기록하는 3사관(史官)이 되었습니다.성리학을 기반으로 삼았던 조선시대에는 내외분별에 따라 사대부 부인이 집밖에 나가 활동할 수 없었으나 여성은 벼슬을 받을 수 없었지만, 난설헌은 「궁사(宮詞)」에서 자신을 여상서(女尙書)로 설정하였습니다.

 

天牛閣下放朝初.(천우각하방조초)   천우각 대궐 아래 아침해가 비치면

擁箒宮人掃玉際.(옹추궁인소옥제)   궁녀들이 비를 들고 층계를 쓰네.

日午殿頭宣詔語.(일오전두선조어)   한낮에 대전에서 조서를 내리신다고

隔簾催喚女尙書.(격염최환여상서)   발 너머로 글 쓰는 여상서를 부르시네.

 

「광한전백옥루상량문」에서 광한전 주인이 백옥루를 새로 지으면서 상량문을 지을 문인이 없어 자신을 불렀다고 상황을 만든 것도 난설헌 자신이 천하제일의 문장가라는 자부심에서 나왔다. 고 하였습니다.

 

초당4부자의 조천록연구 〈보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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