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씨오문장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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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국 가선대부 경상도관찰사 허공 신도비명 병서(有明朝鮮國嘉善大夫慶尙道觀察使許公神道碑銘 幷序)
허경진 연세대 교수
내가 바다 건너에 갔다가 돌아와 보니 우리 무리들이 귀양을 가서 많이 쇠퇴했는데, 오직 우리 허공(許公)만은 처음의 뜻을 변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가 13년이 지났는데, 갑자기 나로 하여금 끝없는 비통함을 길이 끌어안게 만들었다. 이제 그의 두 아들이 가장(家狀)을 보이며 (신도비명을) 부탁하였다. 아아! 공의 자취는 응당 비석에 새겨 본받을 만하다. 의리상 거절할 수 없지만, 내 어찌 차마 공의 비문을 지으랴.
삼가 살펴보니 허씨(許氏)는 김수로왕(金首露王)의 비(妃)에서 나왔다. 비조(鼻祖) 선문(宣文)은 고려 태조를 도와서 삼한(三韓)을 평정하고 공암(孔巖)을 식읍(食邑)으로 받아 마침내 대대로 양천인(陽川人)이 되었다. 8대를 고관1) 으로 이어져 오다가, 공(珙)에 이르러 벼슬이 시중(侍中)에 오르고 이름난 재상이 되었다. 관2) ·백(伯) ·경(絅) ·금(錦)이 모두 재상이 되었는데, 문장(文章)과 덕업(德業)은 금(錦)이 더욱 뛰어났다.
기(愭)가 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로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는데, 이 분이 공의 고조를 낳았다. 고조는 절충장군(折衝將軍) 충무위 호군(忠武衛護軍)으로 병조참판으로 추증된 추(樞)이다. 증조는 성균관 전적(典籍)으로 승정원 도승지에 추증된 창(菖)이다. 조부는 금화사(禁火司) 별제(別提)로 이조참판에 추증된 담(聃)이다. 아버지는 군자감(軍資監) 부봉사(副奉事)로 이조참판에 추증된 한(澣)이다. 외조부는 창녕 성씨(昌寧成氏) 돈녕부(敦寧府) 판관 희(熹)이다. 정덕(正德)3)정축년(1517) 12월 29일이 공이 처음 태어난 날이다. 공의 휘는 엽(諱)이고, 자는 태휘(太輝)이니, 초당(草堂)은 그의 별호(別號)이다. 가정(嘉靖)4) 임진년(1532)에 참판공(參判公) 상을 당해 시묘살이를 하였다. 경자년(1540) 진사(進士)에 선발되고, 병오년(1546) 문과 갑과(甲科)에 급제하였으며, 계축년(1553)에 대관(臺官)에 올랐다. 5)
이때 윤춘년(尹春年)이 왕대비(王大妃)의 종조제(從祖弟)로 요직에 있으면서 일을 도모하였는데, 공에게는 중내형(重內兄)이었다. 그가 일찍이 이감(李戡)을 전조(銓曹)에 천거하여 정부의 관료들이 힘썼으나, 끝내 성공하지 못하였다. 이에 원한을 품고 공의 죄를 끌어 모았지만 아무런 소득이 없자, 공의 선친이 살던 집에 불을 놓았다. 공은 어머니의 마음을 위로해 드리고, 또 조상께 제사드릴 곳이 없음을 걱정하여, 가재(家財)를 다 들여서 새로 지었다. 이때 윤춘년과 같은 부서에 있었는데, 그가 공을 ‘탐학하고 악독하며 토색질을 한다’는 죄목을 날조하고 옆사람을 사주하여 공을 파직시켰다.6)
정사년(1557)에 모친상을 당하였다. 김여부(金汝孚)와 김홍도(金弘度)7)가 당을 만들어서 서로 기울어지니, 공이 여부를 꾸짖었다. 여부가 노하여 홍도가 쫓겨나자, 공이 외직을 구하여 은천(銀川)8) 에 부임했으며, 여부는 얼마 뒤에 패하였다. 기미년(1559)에 서해에 도적이 일어나니 조정에서 의논하기를, “무관 출신의 수령이라야 다스릴 수 있다”고 하여 공을 불러들여 다시 중승(中丞)9) 을 삼았다. 그런데 사람들이 ‘봉사(奉祀)의 문제로 요속(僚屬)의 우두머리와 의견이 맞지 않았다’고 논하여 우두머리는 체직되고, 공도 파직되었다가 곧바로 서용되었다.경신년(1560)에 공조참의(정3품)로 승진하고, 임술년(1562) 가을에 가까운 시종으로 들어와 야대(夜對)하며10) 아뢰었다.
“나라에서 의지하여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인재입니다. 인재가 나오지 못하면 인심이 바로 잡아지지 않으며, 인심이 바로 잡히지 않으면 참으로 성인의 도가 밝아지지 못하게 됩니다. 신이 최근 외람되게도 성균관을 관장하고11) 있었습니다만, 감히 믿을 만한 사람이 없으니, 이것은 진실로 그럴만한 이유가 절로 있습니다. 중종께서는 지치(至治)에 깊은 의지를 두시어 조광조(趙光祖)가 특별한 사랑을 받아, 감격하여 은혜에 보답코자 해서 군주를 요순과 같이 만들고 백성들을 요순시대의 백성처럼 만들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참소가 횡행하여 분에 없는 화에 걸렸습니다. 이로부터 인심이 크게 무너져서 구제할 수가 없었습니다. 빨리 그를 신원해주셔서 풍속을 변화시키면 인심이 안정되고 국가가 편안해질 것입니다.” 왕께서 이르시되, “그 일은 선왕 때의 일이다. 어찌 감히 가벼이 의논하는가?”라고 하자, 공이 다시 반복하여 극진히 진술하고, 또 이렇게 아뢰었다. “요즘 허자(許磁)는 인재의 선발을 담당하면서 관절(關節)12) 을 쓰지 않아서 비방을 쌓아 멀리 귀양을 갔습니다. 구수담(具壽聃)은 자기의 처지를 돌보지 아니하여 결국 사사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중벽(重辟)을 하지 않으려면 반드시 복주(覆奏)13) 를 하게 되어 있건만, 대신의 경우에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신은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또 아뢰었다.
“어떤 사람이 뇌물을 받아서 한번 내사(內司)에 던져지기만 하면 하늘을 우러러 크게 탄식할 뿐이고 달리 길이 없는 법입니다. 이 점을 잘 알아두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여러 소인배들이 다투어 노하고 반박하여 체직이 되었다.
계해년(1563) 6월에 삼척부사(종3품)에 제수되었지만, 8월에 이량(李樑)이 이감(李戡)으로 하여금 명사들을 일망타진하게 꾀하여, 공에게까지 일이 미쳤다. 공은 삼척부에 부임한 지 13일 만에 파직당하였다. 얼마 있다가 이량이 귀양을 간 뒤에 다시 임용되었다. 윤원형의 무리는 공이 밤에 독대한 일이 옳지 못하다고 트집을 잡아서, 높은 관직에 서용해서는 안 된다고 주청하였다.
융경(隆慶)14) 정묘(1567)에 다시 승지가 되자,15) 거듭 계청하였다.“윤원형과 이기(李芑)가 선왕과 선왕후를 속이고, 이름난 선비들을 다 거론하여 모두 반역의 죄명을 씌웠으며, 혹 죄망에서 벗어난 사람이 있다고 하여도 몰아다가 하나의 함정에 빠뜨렸습니다. 이제라도 그 죄를 바로잡고 그 원한을 풀어준다면, 조정의 화합을 이루어 낼 수가 있고, 억울한 눈물도 그치게 할 수 있습니다.” 또 아뢰었다.
“선신 이언적(李彦迪)이 지은 서적을 가져다 그 뜻을 연구해보니, 이 사람도 또한 사표(師表)입니다. 지금 이황(李滉)이 병을 이유로 집에 있는데, 공경을 극진히 하고 예를 다한다면 반드시 조정에 나올 것입니다. 명종이 부르셨던 이항(李恒)과 조식(曺植)은 노쇠하여 물러갔으나, 정성으로 불러들인다면, 장차 조정에 올 것입니다. 옛날 정자(程子)와 주자(朱子)가 송나라에 태어났으나 등용되지 못하였는데, 그것은 천고에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이종(理宗)16) 이 그들을 존중할 줄 알고 그 글을 숭상할 줄 알면서도 그 참되고 고상함을 몰랐으니, 또한 무슨 유익함이 있겠습니까?”
임금이 이황을 불러 오도록 하자, 이황이 다시 조정에 나아갔다. 공이 또 아뢰었다. “선조(先朝) 때 서얼 이중호(李仲虎)와 장륜(張崙)의 학문과 행실이 세상에 떨쳐 배우려는 자들이 그를 많이 따랐습니다. 지금 박형(朴泂)은 [소학]을 가르쳐 그 무리가 늘 수 백인입니다. 그를 천거하여 동몽훈도(童蒙訓導)에 보임하였으나, 고시에 나아가지 않아 파출되었습니다. 그래도 학문에 마음을 다하여 게을리하지 않습니다. 청하오니 이중호와 장륜의 예에 따라 봉록을 주십시오.” 왕이 그 말대로 하였다. 무진년(1568)에 진하사(進賀使)에 충원되었으며, 책봉태자부사(冊封太子副使)에 봉해졌다. 『독서록』을 구입하여 올리자, 인쇄하여 반포하도록 명하였다.17)
기사년(1569)에 옥당(玉堂 홍문관)의 장(長 부제학 정3품)으로서 임금께 아뢰었다.“근습(近習)18) 이란 명칭이 말세에 생겨났는데, 요즘 국가의 환란이 대부분 외척이 왕비전(王妃殿)이나 대비전(大妃殿)과 결탁함에서부터 연유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가장 근심스럽습니다.” 또 아뢰었다. “신하가 임금을 사랑하려면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경계해야 하며, 바른 사람을 모함하면 허물이 되니, 마땅히 살펴보셔야 합니다.” 또 아뢰었다. “두 이씨(李氏)와 조씨(曺氏)를 한(漢)나라 조정의 고사(故事)에 의해서 해마다 급료를 주고 장리(長吏)로 하여금 때때로 문후케 하십시오. 봄가을로 양과 술을 장만하여 방백들이 여러 유생들에게 효제충신(孝悌忠信)의 도를 효유하게 한다면, 원근이 모두 성상의 뜻을 알아서 인심이 맑아지고 풍속이 교화될 것입니다.” 또 아뢰었다.
“김개(金鎧)가 ‘정광필(鄭光弼)이 이행(李荇)과 같은 사람’이라고 하였으니, 그가 간사하고 망녕됨이 극심합니다. 그 두 사람은 곧다고 하지만 김안로(金安老)가 한 번은 꺼리고 한 번은 합함으로써 거의 나라를 망칠 뻔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중종께서 차츰 깨달으심에 따라 나라가 망하지 않았습니다. 논의를 어지럽히는 간악함을 마땅히 살피셔서 통렬하게 배척하셔야 합니다.” 또 아뢰었다.
“예조(禮曹)에서는 ‘향약(鄕約)을 시행하면 원민(遠民)이 왕래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고 여깁니다만, 조서와 명령을 내리면 선포하여 움직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찌 심산궁곡(深山窮谷)이란 이유로 무리들을 인도하는 일을 폐기하겠습니까?” 그러나 임금이 향약을 사용할 수 없다고 하여서, 마침내 시행되지 않았다. 공은 이조(吏曹) 참의(정3품)로 3년을 지내다가 근례에 따라 그만 두었다. 강직하여 아첨하지 않았으므로 낭관이 염려하였다. 그래서 대사성(大司成 정3품)의 직을 주려고 도모하였는데 이루어지지 않다가, 대사간(大司諫 정3품)을 제수받았다. 공이 전응기(田應麒)의 죄가 억울하다고 여겼는데, 동료들의 의논이 일치하지 않음을 보고, 병을 핑계대고 사면하였다. 후에 다시 의금부의 직에 임명되었으나 의리상 차마 국문하지 못하고, 항소(抗疏)를 올려 사임하였다. 또 병으로 면직되었다. 이로써 뉘우치는 자들이 많아졌고, 결국은 사형의 죄로 논하는 일이 줄어들었다.
처음에 을사사화 공신의 훈공을 삭탈하자는 의론을 제기하자,
공신들이 공에 대해 ‘홀로 이론(異論)을 제시하는 자’라고 탄핵하고자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서쪽에 거한 지 1년여 만인 만력 계유(1573)에 복직되어 관장(館長)이 되자 아뢰었다. “[주례]에 보면, ‘궁중의 동정을 총재(冢宰)가 알지 못함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최근에 종척(宗戚)을 불러 보셨는데도 승정원이 모를 수 있습니까?” 왕이 노하여 말하였다. 그 후 불러들여 의견을 물으실 때, 다시 왕을 지적하기를, ‘상이 유순한 것을 좋아하고 강직한 것을 싫어한다’고 하였다. 그 말이 몹시 긴절하니, 왕이 “이게 무슨 일인고!” 하며 옥음이 매우 떨리니 좌우가 실색하였다. 공이 왕의 잘못 늘어놓기를 그치지 않았다.
공은 아홉 번이나 성균관을 맡았으나 항상 개연히 인재의 양성을 자신의 책임으로 여겨, 착한 것을 장려하고 잘못을 막으며, 폐지되고 실추된 것을 일으키고 교육과 벌을 엄히 하였다. [대학], [중용], [근사록]을 통독하고, 「유행편(儒行篇)」을 베껴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벽에 붙여두었다. 사학(四學)에 두루 벼슬하면서 성균관에서 하듯이 하여, 놀랍고 괴상한 일들이 안정되었다. 긍지를 지니게 하고 분발하는 일에 뜻을 두어, 먼저 서원의 기강을 바로잡고 보호하기를 집안 일을 하는 정도에 그치지 않았다.
을해년(1575)에 다시 대사간(大司諫)이 되었다. 이때 주인을 죽인 자가 있어 죄를 다스리라고 옥으로 내려보내졌는데, 공이 복심(覆審)을 청하였다. 위관(委官)인 정언 조원(趙瑗)이 아뢰길, “임금이 대신을 가벼이 하는 조짐이 보인다.”고 하였다. 이에 부화하는 자가 아주 많아서, 시비가 잇달아 일어났다. 대사헌과 공이 모두 교체되었다. 기묘년(1579) 5월에 영남의 관찰사가 비게 되어, 왕이 삼공(三公)에게 명해서 의논케 하자 5명이 천거되었다. 왕이 공을 발탁하자, 공이 오랫동안 정체되어 있다가 비답(批答)이 나오자 중외의 인사들이 모두 경하하였다.
공은 교화를 급선무로 삼아, 사재(思齋) 김정국(金正國)이 지은 [경민편(警民編)] 가운데 결락된 ‘군상(君上)’ 부분을 보충하여 목판에 새겨 간행해서 여항에 수천 권을 배포하였다. 또 큰 고을로 하여금 [삼강오륜행실도(三綱五倫行實圖)]를 판각하게 하였다. 이르는 곳마다 문묘(文廟)에 배알하고 제생(諸生)에게 늠식(廩食)을 주었으며, 반드시 ‘위학지방(爲學之方)’을 적어서 보여 주었다. 송사(訟詞)의 말을 해부하고 분석하였으며, 도적의 연수(淵藪)를 수색하여 적당을 갈라내었다. 또한 구습을 없애려고 하였다. 유언비어가 크게 일어났으나 괘념하지 않았다. 9월에 풍한(風寒)에 걸려 사직소를 올렸으나 허락지 않자, 감격하여 더욱 힘을 내었다. 이듬해 봄에 재차 사직하고, 일선(一善)에 이르렀으나 병이 극심하여 2월 4일 상주(尙州)의 객관에서 서거하였다.
그해 4월 23일에 과천현(果川縣) 국일촌(菊逸村) 서쪽에서 유좌(酉坐) 묘향(卯向)19) 언덕에 장례지내니, 공을 아는 사람이나 모르는 사람이나 할 것 없이 안타까워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장례에 참석한 자가 수백을 헤아렸다. 국학과 도봉서원(道峯書院)20) 및 심곡서원(深谷書院)21) 의 원생들이 모두 와서 제사를 지내니, 공이 도(道)를 호위한 공로와 덕(德)을 진작시킨 풍모를 속일 수 없다 하리라.
공은 기상과 도량이 일찍 이루어져, 7-8세에 효성과 우애가 여느 사람들보다 크게 뛰어났다. 스승에게 나아가 권면하고 신칙하지 않아도 열심히 공부하여, 나날이 뛰어나게 나아졌다. 일찍이 [송사(宋史)]를 읽다가 “진문룡(陳文龍)이 오랑캐에게 잡히자 자기 배를 가리키며 ‘이것이 모두가 절의(節義) 문장이니, 어찌 핍박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는 구절에 이르자 책을 덮고 감탄하며 말하였다. “선비가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한다.” 마침내 표시해서 정곡으로 삼고 더욱 스스로 격앙하였다. 하루는 홀연히 탄식하며 말하였다. “정자(程子)와 주자(朱子)가 나오기 전에도 학문이 어둡지 않았던 것은 아니어서, 사람들이 논하여 이르는 바에 볼 만한 것이 많았다. 정자와 주자 이후에 학문이 밝아지지 않은 것이 아니지만, 그 얻은 바가 도리어 한(漢)이나 당(唐)만 못한 것은 스스로 터득한 것과 남의 말을 얻어 들은 것의 차이가 아니겠는가?” 그래서 나식(羅湜) 공에게 질문하고, ‘회재(晦齋) 이선생(李先生)이 인종에게 [심경부주(心經附註)]를 강(講)하도록 권하였다’는 말을 듣고는, 그 책을 찾아 읽고 놀라워하며 학문의 바른 길을 찾았다. 진천(鎭川)의 이여(李畬) 선생이 수학(數學)에 정통하고 [주역]에 이해가 깊다는 말을 듣고 다시 나아가 전수받았다.
그뒤에는 화담(花潭)에 가서 문강공(文康公)을 사사했는데, 화담이 위독해지자 [원리기(原理氣)] 등 논문 6편을 공에게 구술(口述)하여 전하였다. 공은 늘 그 학문을 다 배우지 못함을 한스럽게 여겼다. 공이 처음에는 문사(文詞)에 능하였으나 이로부터 모두 버렸으며, 어진 이를 존중히 여기고 선비 사랑하기를 마치 기갈을 들린 것보다 더 하였다. 종성령(鍾城令)과 동문이 되어 배우게 되자, 이웃에 살면서 하루도 빠짐없이 강론하고 논평하였다. 처사 가운데 추종하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그 학문의 성취가 어떠한지 물었다. 그러나 정치의 득실이나 인물의 선악은 한마디도 교환하지 않았다.
새벽에 일어나 종가(宗家)를 향하여 재배하고, 물러나 한 방에 거문고와 책을 두고 밖의 유혹을 모두 물리쳤다. 고금의 격언들을 걸어두고 자신의 잘못을 살폈으며, 몸이 피곤하면 눈을 감고 잠명(箴銘)을 서너 번 외웠다. 밤이 깊어서야 잠자리에 드는 것을 상례로 하였다. 천석(泉石, 자연)을 매우 좋아하여 화창한 철이 되면 지인을 이끌고 교외로 나가 흥이 다하여야 돌아왔다. 다른 사람과 경계를 두지 않았으며, 자리에 손님이 늘 가득하였다. 채소와 거친 밥이어도 반드시 함께 나누었다. 젊어서 바둑에 탐닉했다가 어른이 꾸짖는 말을 하자 얼굴이 붉어지고 땀을 흘려, 종신토록 다시는 바둑을 두지 않았다.일찍 부친을 여의고 어버이의 안색을 살펴 봉양할 길이 없자, 판관공 섬기기를 부모 모시듯 하였다. 일백 번을 말하여도 이간질하는 법이 없었다.
봉록(俸祿)을 받으면 곧 동생이나 조카들에게 나누어 주고, 결혼을 하거나 상을 당한 사람이 있으면 힘을 다하여 돕고 돌보았다. 자신의 옷을 벗어 입혀주기까지 하였다. 유희춘(柳希春)이 종성에 귀양갔을 적에 여러 번 추위를 막는 옷가지를 보내어, 끝까지 그렇게 하였다. 늘 자제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힘이 비록 넉넉하지 않더라도 항상 어질게 돕는 마음을 보존하고, 반드시 외물에 미칠 때는 시기를 맞추어서 하여야 한다.” 대개 그 풍도가 응축되고도 원대하였던 것이다. 만년에는 다시 즐겁고 간이해져, 즐거움과 노여움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았으며, 혹시라도 모진 말투로 종들을 꾸짖는 일이 없었다.
두 조정에서 벼슬을 하면서 ‘속이지 말라[勿欺]’를 위주로 하였고, 외직이건 내직이건 전력과 정성을 다하였다. 대체(大體)를 견지하되, 작은 절조(節操)라 하여도 작게 여기지 않고 중시하였다. 세 고을의 수령으로 나가서는 처자들이 감히 사사로운 짓을 못하게 하였다. 지위가 현달한 지 30년이나 되었지만, 조정에 있어도 벼슬을 안 할 때와 다름없었다. 아! 덕을 쌓아 선을 행하는 것이 이미 누적되고도 풍성하였으므로 큰 복을 누리고 장수하는 것이 마땅하겠지만, 명성과 지위가 이미 부합하지 않은데다가 또한 그 수명을 준 것마저 인색하니, 하늘의 보시(報施)가 어찌 이렇게 어그러졌던 말인가. 아! 슬프도다. 공의 이력(履歷)은 장흥고(長興庫) 직장(直長), 예조·공조·병조·이조의 좌랑(佐郞), 이조 정랑(正郞), 공조·예조·병조·이조·형조의 참의(參議)와 참지(參知)22) 사헌부 장령(掌令)과 집의(執義), 사간원 정언(正言)과 대사간(大司諫), 홍문관 부수찬·수찬(修撰)·부교리(副校理)․부제학(副提學), 시강원(侍講院) 필선(弼善), 의정부 검상(檢詳)·사인(舍人), 독서당(讀書堂) 사가(賜暇), 제용감(濟用監)부정(副正), 군자감(軍資監) 내자(內資)·사도(司䆃)·군기(軍器), 내섬시(內贍寺) 정(正), 성균관 전적(典籍)·직강(直講)·사성(司成)·대사성(大司成), 승문원(承文院) 판교(判校),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우부승지·좌부승지·우승지, 배천군수(白川郡守), 삼척부사(三陟府使), 경주부윤(慶州府尹),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이다.
공의 부인 청주 한씨(淸州韓氏)는 서평군(西平君) 숙창(叔昌)의 딸로, 선수광록시(宣授光祿寺) 소경(少卿) 좌의정 양절공(襄節公) 확(確)의 후손이다. 자질이 명달하여 공을 예로써 섬기고, 효성과 우애가 독실하였다. 일찍이 형제들과 재산을 고르는데, 바라는 것이 있으면 곧 그에게 주고, 전혀 인색하지 않았다. 시어머니는 성격이 매우 엄하였으나 항상 부인을 칭찬하여 말하길, “우리 어진 며느리”라 하였다. 돌아가신 뒤엔 말할 적마다 눈물을 흘리곤 하였다.
후배(後配) 부인은 강릉 김씨(江陵金氏)로 예조참판 광철(光轍)의 딸이니, 신라 종성(宗姓)으로 명원군왕(溟原郡王) 주원(周元)의 후손이다. 공의 자녀는 여섯이다. 전부인의 아들 성(筬)은 생원으로 내시부 교관(內侍府敎官)이다. 사위 박순원(朴舜元)은 전함사 별제(典艦司別提)이며, 우성전(禹性傳)은 진사, 문과에 급제하여 예빈시 정(禮賓寺正)이다. 후부인의 아들 봉(篈)은 생원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의정부 사인이니, 형과 함께 모두 학문을 좋아하고 문장이 가업을 이을 만하다. 균(筠)은 어리고, 사위 김성립(金誠立)은 생원이다. 교관 성은 유수(留守) 이헌국(李憲國)의 딸에게 장가들어 후사가 없으므로, 승지 남언순(南彦純)의 딸을 계실로 맞아 2남 3녀를 낳았다. 사인 봉은 전 군수 이우빈(李禹賓)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1녀를 낳았다. 별제 박순원은 1남을 낳으니 종현(宗賢)으로, 생원이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士或志仁(사혹지인) 선비가 인에 뜻을 두었어도,
亦鮮嗜學(역선기학) 학문을 즐기는 이는 드문데,
于志于嗜(우지우기) 학문에 뜻을 두고 학문을 즐기면서
厥修罔覺(궐수망각) 자신을 수양함에 게으름이 없었도다.
魯無君子(노무군자) 노나라에 군자가 없었다면
公焉取斯(공언취사) 공이 어찌 이를 취했으리오.
克持弗渝(극지불투) 뜻을 잘 유지하여 어기지 않았고
忠信以基(충신이기) 충과 신으로 바탕을 삼았도다.
載揚王庭(재양왕정) 왕의 조정에서 왕명을 선양하고
騫于邇列(건우이열) 근시(近侍)의 열에서 매진하였으며,
銓衡帷幄(전형유악) 전형(銓衡)의 자리를 맡고 경연에 들어
耳目喉舌(이목후설) 군주의 귀와 눈이 되고 목구멍과 혀가 되었네.
犯逆堅懇(범역견간) 뜻을 거스르면서까지 간절한 충성을 고집하였기에
聖衷內回(성충내회) 성군의 내심도 안으로 돌아섰다네.
辨遏挫敲(변알좌고) 하지만 간신들이 막고 좌절시켜
衆口積猜(중구적시) 뭇 사람들의 시기하는 말이 쌓이니,
屢遭斥犇(누조척분) 여러 번 배척되고 좌천되었으나
反而益縮(반이익축) 돌이켜 더욱 올곧으셨네.
九典敎胄(구전교주) 구전(九典)으로 자제들을 교육하니
始駭乃服(시해내복) 처음에는 놀랐지만 나중에는 심복하였네.
王軫嶺表(왕진영표) 왕께서 영남의 고을을 맡기시며
其往撫循(기왕무순) 가서 백성들을 안무하고 순리를 따르라 하였으니,
公承德意(공승덕의) 공은 덕스런 뜻을 받들어
刻勵作新(각려작신) 온 정성을 다 바쳐 쇄신하였네.
惟慕惟晦(유모유회) 오로지 흠모하고 오로지 반성하여
是範是守(시범시수) 이를 모범으로 삼고 이를 지켰건만,
顚連胥悅(전연서열) 좌절하여 곤액을 당하자 간당이 서로 기뻐하고
浮○競詬(부○경후) 멋대로 뛰는 준마같다고 다투어 헐뜯었네.
惟疾弗轍(유질불철) 오로지 미워하여 그치지를 않았지만,
惟誠弗窮(유성불궁) 오로지 성실하여 곤궁으로 여기지 않았고,
惟弗自惜(유불자석) 스스로를 아끼는 일이 없었으니
奈何乎公(나하호공) 이러한 공을 어이 하랴.
孰曰未學(숙왈미학) 누가 공을 두고 학문을 하지 않았다 하랴.
孰如其仁(숙여기인) 누가 공처럼 어질 것인가.
非公之慊(비공지겸) 공이야 마음에 들지 않겠지만
我擬其倫(아의기륜) 나는 공의 짝이 되도록 힘쓰리라.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좌의정 겸 영경연·감춘추관사
(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左議政兼領經筵·監春秋館事) 노수신(盧守愼) 짓고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 남응운(南應雲) 전(篆)하고
성균 진사(成均進士) 한호(韓濩) 쓰다
만력(萬曆) 10년 임오(1582) 월 일에 세우다.
* 경주부윤 이제민(李齊閔)이 1572년에 이언적(李彦迪)을 제향하는 옥산서원(玉山書院)을 건립하였다. 이언적을 사숙(私淑)한 초당(草堂) 선조가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한 1579년에 옥산서원을 방문하여 확충하였으며, 이언적의 제자인 권덕린(權德麟)의 부탁을 받아 〈옥산서원기(玉山書院記)〉를 지었다. 경주 유림의 뜻을 모아 옥산서원을 세우고 경주부와 경상감영에서 지원하였으니, 앞으로 국가에서 필요한 인재들이 경주에서 배출되기를 바란다는 뜻이 담겨 있다. 지금도 옥산서원 구인당(求仁堂)에 초당선생의 친필 〈옥산서원기〉 편액이 걸려 있으며, 옥산서원은 2019년 7월 6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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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문의 잠조(簪組)는 관모(官帽)를 고정하는 비녀인 관잠(冠簪)과 관인(官印)을 묶는 끈으로, 관리 또는 고관(高官)을 가리킨다.
2) 『고려사절요』 권22 충렬왕 29년(1303) 7월 기사에 관이 급제한 기록이 보인다. “병과(丙科)의 수석한 허관(許冠)은 공(珙)의 아들이며, 송분의 사위였다. ... 관은 낭장에 제수된 지 4년이 되어도 사은하지 않았다. 송분이 말하기를,“벼슬길이 여러 길이 있는데, 하필 과거에 올라야만 되겠느냐?”하니, 관이 말하기를,“ 인(先人)이 저에게 종이를 주면서 이것을 가지고과거에 응시하도록 하라 하셨는데, 제가 비록 과거에 누차 실패하였으나 종이가 그대로 있으니, 어찌 감히 빨리 벼슬에 나아가기 위해 아버지의 명을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하였다. 왕이 평소에 그 이름을 듣고는 발[簾] 앞까지 불러서 특별히 서각띠를 주었다.”
3) 명나라 무종(武宗)의 연호로, 1506년부터 1521년까지 16년간 사용하였다.
4) 명나라 세종(世宗)의 연호로, 1522년부터 1566년까지 45년간 사용하였다.
5) 허엽이 1553년 6월 10일에 사헌부 장령(정4품)에 제수되었다.
6) 사헌부와 사간원의 탄핵이 『명종실록』 8년(1553) 9월 18일 기사에 실렸는데, 사초(史草)를 정리하던 사관이 ‘허엽은 죄가 없다’고 해명하였다. “장령 허엽(許曄)은 성품이 본래 어두워 시비를 분변하지 못하며 마음 내키는 대로 제멋대로 행동합니다. 자기 집을 지으려고 평소 알지도 못하던 황해도 만호를 자기 집에 불러다가 재목을 수송해 오도록 요구하였습니다. 그 만호는 변통하여 마련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자신의 답답함을 어떤 재상집에 하소연하였습니다. 또 간의대 사령(簡儀臺使令)을 뽑아다가 그 집에 사역을 시키기도 했습니다. 사인(舍人)이 되었을 때는 예빈시(禮賓寺)의 하인으로서 북평관(北平館)의 고직(庫直)으로 있는 이를 불러다가 모직물을 무역하게 했는데, 자기 뜻에 맞지 않으면 즉시 구금하곤 하였습니다. 그 외에도 여러 고을에서 물건을 징수했던 탐욕스러운 일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이감(李戡)은 허엽이 이조 좌랑이 되었을 때에 자기를 천거해 주지 않은 것에 대해서 원망을 품었다. 그때 마침 허엽의 종가(宗家)가 불에 타서 다시 집을 짓게 되었는데, 이감은 의심스러운 흔적을 찾아내 허엽을 몰아붙였다. 대사헌 윤춘년(尹春年)이 그 말을 믿고 허엽을 탄핵하려 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윤춘년에게 ‘허엽이 짓는 것은 종가이다. 의심스러운 흔적을 가지고 논박한다면, 한지원(韓智源)과 심전(沈銓)은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하니, 윤춘년은 ‘한지원과 심전은 참으로 죄가 있다 하겠거니와, 허엽은 사림의 명망을 받고 있으니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 하는 일이 이와 같고서야 어떻게 사람들의 마음을 만족하게 할 수 있겠는가.]
7) 김홍도(1524-1557)의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중원(重遠), 호는 남봉(南峯)ㆍ내봉(萊峯)이다. 1546년 진사에 장원하고 1548년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전한(典翰)으로 재직 중에 윤원형(尹元衡)에 의해 갑산(甲山)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난설헌의 시할아버지이다.
8) 은천은 황해도 배천현의 옛이름이다. 그런데 『선조실록』에는 허엽이 배천현감(종6품)에 부임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9) 한대(漢代)에 어사대부(御史大夫) 밑에 어사 승(御史丞)과 중승을 두었던 데서 유래한 말로,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 종3품)의 별칭이다.
10) 1562년 9월 5일 동부승지(同副承旨 정3품)에 제수되었으며, 9월 21일 참찬관(參贊官)으로 야대(夜對)에 참여하여, 조광조(趙光祖)와 허자(許磁)의 억울함을 아뢰었다.
11) 대사성(大司成 정3품)으로 있었을 때의 상황을 아뢴 것이다.
12) 당(唐)나라 때에 시험관(試驗官)이 자기가 사적으로 봐주려는 선비의 답안지에 기호를 붙여서 식별하기에 편하게 했던 것을 이른 말인데, 전하여 요인(要人)에게 뇌물을 바치고 청탁하는 것을 의미한다.
13) 중벽은 사형이고, 복주는 사형수에 대하여 초심ㆍ재심ㆍ삼심을 거쳐 반복 심리한 뒤에 그 결과에 대한 최종 재가를 받기 위하여 상주하는 지도이다.
14) 명나라 목종(穆宗)의 연호로, 1567년부터 1572년까지 6년간 사용하였다.
15) 원문의 지신(知申)은 고려후기 밀직사의 정3품 관직으로, 조선초에도 잠시 설치했다가 세종 때에 도승지로 바뀌었다. 『선조실록』 즉위년(1567) 11월 5일 기사에 승지 허엽이 새로 즉위한 선조를 야대(夜對)한 기록이 보인다.
16) 남송(南宋)의 제5대 황제.
17) 2월 22일에 명나라 황태자 책봉 진하사(進賀使)에 임명되었으며, 5월 2일에 책봉태자진하사(冊封太子進賀使) 박영준(朴永俊)과 함께 북경에 갔다. 귀국할 때 『설문청독서록(薛文淸讀書錄)』을 구입하여 선조에게 바치니, 인행(印行)하여 반포(頒布)하라고 명하였다.
18) 임금을 가까이서 모시며 임금의 총애를 받는 신하인데, 배우(俳優)나 내시(內侍)까지 포함하여 부정적인 의미로 쓰는 말이다.
19) 서쪽을 등지고 동쪽을 향한 자리이다.
20) 조광조를 추모하기 위해 1576년에 창건한 서원인데, 1972년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282-329에 복원하였다. 서원 입구 시냇가에 우암 송시열과 제자들이 바위에 새긴 글씨가 많아, 2009년 10월 22일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28호 「도봉서원과 각석군」으로 지정되었다.
21) 역시 조광조를 추모하기 위해, 그의 무덤이 있는 용인에 세운 서원이다. 1650년에 편액과 노비 토지를 하사받았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에도 훼철되지 않고 존속되어, 경기도유형문화재 제7호로 지정되어 있다. 초당이 조광조 신원에 앞장섰으므로 이 두 서원에서 모두 조문한 것이다.
22) 참지도 참의와 마찬가지로 정3품 관직인데, 병조에 업무량이 많이 참지 1명을 더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