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문을 빛낸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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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世 대사헌(大司憲) 초당공(草堂公) 엽(曄) 영정(影幀)
허엽(許曄, 1517~1580)
초당(草堂) 시호(諡號) 허엽(1517∼1580) 시조(始祖) 선문(宣文)의 20세손이다.
양천허씨의 강릉 입향조는 허엽이다. 자는 태휘(太輝)이고, 호는 초당(草堂),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서경덕의 문인으로 1540년(중종 35) 진사시에 입격하고, 1546년(명종 1) 식년문과 에 갑과로 급제하여 1551년(명종 6)에 홍문관 부교리를 거쳐 사가독서(賜暇讀書)한 뒤 사헌부 장령을 지냈다. 사헌부 장령으로 있던 그 해에 종가(宗家)가 불에 타자 이를 다시 짓기 위해 황해도 만호(萬戶)에게 재목을 수송해 오도록 한 것이 문제가 되어, 그때 처가가 있는 강릉으로 내려온다. (『명종실록』권15, 8년 9월 신유조 : 20- 159). 그 후 시강원필선(侍講院弼善)을 지내고, 이듬해 성균관 대사성에 올랐으며, 1562년(명종 17)에 참찬관이 되어 경연에 참석하여 조광조의 신원(伸寃)을 청하고 구수담의 무죄를 논한 사건으로 파직되었다. 이듬해 삼척부사로 복직되었다가 과격한 언사로 인해 하직하고, 1568년(선조 1)에 다시 기용되어 진하부사(進賀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대사간에 올랐다.
그 후 부제학을 거쳐 경상도 관찰사에 임명 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고 돌아오는 길에 상주의 객관(客館)에서 생을 마감했다. 1초당공은 슬하에 3남 3녀를 두었다. 청주한씨 숙창(淑昌)의 딸과 결혼하여 박순원 (朴舜元)과 우성전(禹性傳)에게 시집간 두 딸과 장남 성(筬)을 낳았고, 한씨와 사별한 후 강릉김씨 광철(光轍)의 딸과 결혼하여 봉(篈)·난설헌(蘭雪軒)·균(筠)을 낳았다.
특히 김씨 소생의 3남매는 뛰어난 문학적 재능으로 큰 명성을 얻었다.
그리하여 실록의 사평(史評)에 “허엽의 세 아들인 성·봉·균과 사위인 우성전·김성립(金誠立)은 모두 문사로 조정에 올라 논의하여 서로의 수준을 높였기 때문에 세상에서 ‘허씨가 당 파의 가문 중에 가장 치성하다’고 일컬었다”고 기록될 정도였다. 공을 비롯해 성, 봉,난설헌, 균을 합하여 ‘허씨오문장가’라 칭해왔다. 인격과 행실도 여러 사람에게 칭송을 받아 동인의 우두머리에 이르렀고 김정국이 찬수한 『경민편』을 보충하여 반포하고 『삼강이륜행실』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초당 허엽선생 시비(草堂 許曄先生 詩碑)
許椽來遊下界塵(허연래유하계진) 우리가 속세에서 살았는데
大同江上喚眞眞(대동강상환진진) 대동강에 와보니 참으로 좋구나
相將去作吹簫伴(상장거작취소반) 친구와 놀다 헤어질 때 퉁소 부는데
浮碧樓高月色新(부벽루고월색신) 부벽루 위에 달빛이 아름답네.
一九六九年 己酉 六月 一日 國語國文學會建立
1969년 을유 6월 1일 한국국문학회건립
十二代孫 盥水 敬書 12대손 강 관수 경서(손을 씻고 공경하게 쓰다)
송담서원 권우석 원장이 번역하고 성 균관대 오석원 교수가 검토하다. 초당공 엽(曄)시비 도로 건너편에 강릉 시농업기술센터에서 초당두부를 화강 암으로 조각하여 세우다.
한국국어국문학회 회장 김동욱(연 세대 국문학교수) 박사와 양천허씨대 종회 회장 12대손 강(穅)은 공께서 강릉에 처음 내려와 정착했던 초당동 475-3번지에 초당공 엽(曄)시비를 건립하려자 하였으나 토지매입이 불가능 하여 마을 어귀 초당동 134번지 김홍장의 소유 토지7평을 매입해 시비를 세웠다.
분할최소면적에 못 미쳐 소유권 이전을 못하고 토지소유자가 정씨, 송씨로 바뀌면서 현소유자가 목욕탕 신축을 하려고 하니 장애가 된다며 초당공(曄) 시비 이전을 요구하여 토지매입가와 시비이전에 소요되는 비용을 정산 후 1998년 12월 26일 허씨 오문장가 시비건립 시 강릉시 초당마을 입구 초당동 127-14번지 현 위치로 이설하였다.
한국국어국문학회 회장 김동욱(연세대 국문학 교수)박사는 시비에 “사람은 가도문학은 남다. 조선의 명유 초당 허엽선생의 시비(詩碑)이다. 선생과 자녀 악록공 성(筬), 하곡공 봉(篈), 교산공 균(筠), 난설헌 여사 허초희가 다시 문으로 16C에 빛나니 허씨 오문장이라 하다.
선생은 이 초당촌에 사실 때 마을사람들이 아호를 초당이라 삼고 교산공은 북으로 20리 사천이 바다로 열리는 교산(蛟山)에서 아호를 따시니 이 곳 여러 구비는 선생이 노시던 땅이다. 귀를 기우리면 시를 읊으시던 성음이 들리는 듯 하고녀” 라고 글을 남겼다.
- 연세대학교 김동욱 박사가 번역하고 쓰다. -
경주 옥산서원기(玉山書院記)
▲ 초당 허엽 친필
경주 옥산서원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습니다. 옥산서원을 세운 분이 바로 초당허엽입니다. 초당공이 경상감사 시절에 기록한 <옥산서원기> 친필에 경주부윤이 옥산서원을 세우겠다고 신청하여 경상감사 초당공이 재물을 후원하여 세웠습니다. [玉山書院記 번역은 초당전집국역에 넣을 것입니다.]
옥산서원은 2019년 7월 6일, 제43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16~17세기에 건립된 다른 8개 서원과 함께 오늘날까지 한국에서 교육과 사회적 관습 형태로 지속되어온 성리학과 관련된 문화적 전통의 증거이며 성리학 개념이 여건에 맞게 바뀌는 역사적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아 '한국의 서원(Seowon, Korean Neo-Confucian Academies)'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의 14번째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9개 서원은 소수서원(1543년 건립), 남계서원(1552년 건립), 옥산서원(1573년 건립), 도산서원(1574년 건립), 필암서원(1590년 건립), 도동서원(1605년 건립), 병산서원(1613년 건립), 무성서원(1615년 건립), 돈암서원 (1634년 건립)이다.
친필소장 허경진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