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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가동정

강선생의 친절한 역사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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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관리자 작성일24-01-24 10:42 조회12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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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에서 강선생의 친절한 역사이야기에 대하여

 

강선생님의 [허균의 진짜 모습] 강의를 감명 깊게 경청하였습니다.

저는 초당허엽공의 12대 후손으로 맏아드님 성(筬)자 11대손 허세광입니다.

 

교산 허균과 난설헌에 대해 많은 학술세미나와 국제학술대회 등을 통해 듣고 많은 책도 보고 하였습니다만 강선생님께서 교산허균을 보는 생각과 강의기법이 매우 남달랐습니다.

 

강의 내용 중에 다음 사항을 재확인하고 바로 잡아주시기 바랍니다.

 

1. 허균은 형조참의가 아니고 형조판서(刑曹判書(정2품)-광해군일기 팔년 5월 15일)光海君日記 八年 五月 十日에서, 이 허균위좌참찬(以許筠爲左參贊)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구년십이월 십이일(九年十二月 十二日)좌참찬으로 올랐습니다.

 

2. 허균의 기생에 혹하여 원주에서 어머니가 죽었는데 강릉에서 가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엽, 부인 강릉김씨.기육월십팔일.-양천허씨세보 권이(曄, 夫人江陵金氏. 忌六月十八日.-陽川許氏世譜 卷二) 갑오년(1594) 여름에 사관(史館)으로 천거되었으나 복(服)을 입게 되어 강(講)에 응하지 못하였고, 3년 후 정유년(1597) 봄에 비로소 관(館)에 들어갔다. 고 하고 있습니다. 허경진 교수 허균연보

 

이때 교산공은 1594년 2월에 문과 급제하여 서울에서 승문원에 벼슬하고 있었고, 교산공 모친은 평안도 강동현령으로 있는 외손자 박종현을 찾아가다가 흥원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초당공 4부자의 조천록 연구 29~30쪽) 

(임진왜란 피난 중에 교산공과 함께 강릉 애일당에 와 계시다가, 안전한 곳으로 옮겨가신 것입니다.)

 

2. 한백겸(호조참의. 강원도 안무사. 파주목사)이 원주에 땅을 내주어서, 교산공 모친 묘를 원주에 천묘(遷墓)해 썼습니다.

3. 교산공은 5월에 중국사신을 접대하기 위해 의주에  40일 동안 머물고 있었습니다(허균연보 56쪽)

4. 교산공이 사관(교육. 문예를 담당하던 4의 관청⌈성균관. 교서관. 승문원. 문예관⌋으로 천거되었지만 6월 16일 모친상을 당해 삼년상을 치르는 동안 벼슬에서 물러났습니다. (허균연보 58쪽) 

5. 1600년(경자) 3월에  첫 번째 아내의 묘도 원주 모친 묘 옆에 함께 이장했습니다.(허균연보 60쪽)

6. 그 뒤에도 직장이 여기저기 옮겨 다니는 중에도 해마다 한 차례씩 성묘하러 갔습니다.(성소부부고 권6 <유원주법천사기> <遊原州法泉寺記>

7. 삼년상 중에 기생을 끼고 놀았다는 것은 교산공이 역적으로 처형당할 때 핑계를 댄 것 가운데 허균은 강릉에 있으면서 모친이 원주에서 사망하였는데 찾아가지 않았다. 모친상을 당하면서 서울에 있던 직장에 사표를 냈기 때문에 당연히 강릉에 머물면서 원주까지 왔다 갔다 한 것뿐입니다. 교산공은 유불도의 책을 읽었지만 아버지 엽과 맏형 악록공 성은 성균관 대사성을 지낸 전통적인 유교집안입니다.

 

중국에 가서 인삼을 은(銀)으로 바꾸어서 은(銀) 1만량을 주고 책 4천여 권을 책을 구입하여 왔다, 책에 대한 욕심이 많아서 구입하였다고 한 내용은 옳은 말입니다.  

강릉부사 유인길이 임기를 마치고 떠나면서 준 명삼을 32량을 주면서 ‘이것이 공물로 바치고 남은 것이라오. 돌아가는 길에 짐 꾸러미를 번거롭지 않게 하려고 드리는 것이니, 그대의 약용에나 보태 쓰시오.

 

나는“감히 사사롭게  쓸 수 없으니, 이 고을의 학자들과 함께 쓰고 싶소” 하고  상자에 넣어 가지고 서울로 올라왔다. 마침  중국으로 가는  사신 일행이 있어 그것으로 사서, 육경, 성리대전(性理大全), 춘추좌씨전, 국어, 사기, 문선, 이백, 두보, 한유, 구양수 문집, 사륙(四六), 통감 등이 책을 북경 지장에서 구해 가지고 돌아오게 했습니다.

 

그 4천여 권의 책과 본인이 소장하고 있던 책을 합쳐 1만권을 경포호수 옆(초당)에 별장을 비우고 간직한 우리나라 최초의 사설도서관인 호서장서각(湖墅藏書閣)입니다. 주지번은 조선의 3대 문장가라고 잘못표현 한 것입니다.

 

많은 학자들은 능지처참(凌遲處斬)이라는 용어의 표현은 하지 않음을 참고로 말씀드립니다. 이이첨의 정치적 묘략에 책형당한데 대해 후손들은 지금도 아픈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교산공은 1597년(29세) 선조 30년(정유) 3월 1일 문과 중시에 71명이 입장했는데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며, 1609년(41세) 광해군 1년(기유) 5월 14일 월과(月課)에서 잇달아 세 차례나 장원하여 가자(加資)가 되었습니다. 1615년(47세) 광해군 7년(을묘)5월 15일 문신 정시에서 1등을 하였습니다.

 

교산허균은 1594년(26세) 선조27년(갑오) 정시문과에 급제하였고, 이이첨(34세)은 1594년 별시문과 을과 급제하였습니다. 어머니가 죽어도 가지 않는다는 등 나뿐 이야기는 반대파에서 만들어낸 모략(謀略)일 것입니다.

 

명 강의를 해 주신데 대해 거듭 감사를 드립니다.

강릉향교 유림인문학강좌에 모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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