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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씨자료실

허경진의 초당문중과 강릉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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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관리자 작성일23-07-24 09:39 조회6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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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경진의 초당문중과 강릉] 3. 초당에 놀러온 사명대사, 허균 만나다-상

 

서화담의 제자인 초당선생은 서산대사와 친하게 지내면서 편지를 주고받았고, 큰아들 악록공(허성)은 북한산 승가사에서 공부하며 스님들과 가깝게 지냈다. 둘째아들 하곡공(허봉)이 사명당과 친구로 지내며 자주 만나 시를 주고받자, 아우 교산공(허균)도 사명당을 형님처럼 모셨다. 사명당이 세상을 떠나자 제자들이 문집을 편집한 뒤에 허균에게 서문을 부탁했는데, 허균이 서문 첫 줄에서 사명당을 처음 만나던 날의 기억을 이렇게 서술했다.“지난 병술년(1586) 여름에 내가 중형(仲兄)을 모시고, 봉은사(奉恩寺) 아래에 배를 댄 적이 있었다.

 

마침 한 스님이 갑자기 나타나 뱃머리에 서서 읍을 하는데, 헌걸찬 체구에 용모가 단정하였고, 함께 앉아 담화를 나누는데 말이 간단하면서도 그 뜻이 깊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물어 보았더니, 바로 유정(惟政) 스님이었다. 나는 그를 진심으로 사모하게 되었다.”이들은 밤새 시를 주고받으며 문장을 논하였는데, 허균은 “사명당 시의 격조가 마치 거문고 소리와 같이 청고하였다”고 평가했다.

 

3년 뒤에 강원도를 떠돌던 허봉이 별세하자, 사명당이 오대산에서 찾아와 조문하며 슬피 곡하고 또 만시(輓詩)를 지었는데, 그 구절이 너무 처절하여 아직도 생ㆍ사의 즈음에서 해탈하지 못한 듯하기에 허균은 “스님의 수도가 아직 상승(上乘)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것일까. 어찌 속인들처럼 슬픔과 기쁨을 벗어나지 못한단 말인가”하고 의아하게 여겼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허균은 어머니를 모시고 강릉 애일당으로 돌아와 살았는데, 형님같이 모시던 사명당이 스승 서산대사를 대신해 의승(義僧)을 거느리고 여러 차례 왜군을 꺾었단 말을 듣고 뛸 듯이 기뻐했다. 왕명을 받고 가토 기요마사의 진영을 찾아가 담판을 벌여 큰 공을 세웠다는 소식을 듣고는 곧바로 만날 수 없어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허경진의 초당문중과 강릉] 3. 초당에 놀러온 사명대사, 허균 만나다-하

 

허균이 1596년에 외교문서를 관장하는 승문원에서 벼슬할 때에 작은형의 친구이자 영의정인 유성룡을 만나러 갔다가 사명당을 다시 만났다. 이들은 반갑게 손을 잡고 옛날 이야기를 하다가 함께 객사로 돌아왔다. 사명당이 비분강개하여 손뼉을 치면서 시국을 논하는 모습을 보면서 옛날 협객의 풍모가 있다고 여겼기에, “스님의 재주가 국난을 구제할 만한데, 아깝게도 불문에 잘못 투신하였구나”하고 생각했다. 가선대부(종2품) 동지중추부사 벼슬을 받고 관직에 있던 사명당이 1603년 조정에서 물러나 상원사로 돌아왔다가, 마침 허균이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 강릉에 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초당으로 찾아왔다.

 

허균이 경포호에 있던 이 집을 감호서(鑑湖墅)라고 표기했으니, 허균이 자신의 책을 강릉 선비들에게 공개하며 호서장서각(湖墅藏書閣)을 설치했던 바로 그 집이었다.허균은 그 무렵 세상과 어울리지 못해 불경을 읽으며 위안을 받던 중이었으므로 불교의 명심 견성설(明心見性說)을 질문했더니, 사명당이 알기 쉽게 설명했다.허균은 이듬해(1604년) 2월 강릉에서 사명당에게 편지를 보내 다시 벼슬하라고 권하였다.

 

“대사께서는 선기(禪機)에 통달하지 못하신 듯합니다. 섭심(攝心)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 꼭 온갖 인연을 깨끗이 없앤 뒤에야 되는 것입니까? 조정이나 시장바닥, 동네 골목 등 어떤 곳에서도 이룰 수 있습니다.”‘사명집’에는 사명당의 시만 실리고 편지는 없어서 사명당이 이때 어떻게 답장을 써 보냈는지 알 수 없지만, 허균에게 말조심하라며 지어보낸 시가 실려 있어서 답장을 대신할 수 있다. “남의 잘잘못을 말하지 말게나. 이로움 없을 뿐만 아니라 재앙까지 불러온다네. 만약 입 지키기를 병마개 막듯 한다면 이것이 바로 몸을 편안케 하는 으뜸의 방법이라네.”-‘증허생(贈許生)’사명당이 1610년 9월에 입적하자 허균이 제문과 만시를 지어 슬퍼하면서, 작은형이 세상 떠났을 때에 사명당이 슬퍼하던 마음을 이해했다.

 

“정이란 대체 무엇이기에 사람을 이처럼 얽어맨단 말인가”하고 되뇌었다.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라는 시호를 지어 올리고, ‘사명집’ 서문을 지었으며, 사명 송운대사 석장비명(石藏碑銘)을 지어 그의 한평생을 기렸다. 말조심하라는 사명당의 가르침을 실천하지 못해 시대를 앞서가는 주장을 펼치다가 억울하게 죽은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연세대 명예교수

 

출처 : 강원도민일보(http://www.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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