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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을 빛낸인물

가문을 빛낸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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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엽

(許曄, 1517~1580)

허성

(許筬, 1548~1612)

허봉

(許篈, 1551~1588)

허난설헌

(許蘭雪軒, 1563~1589)

허균

(許筠, 1569~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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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04.png  허균(許筠, 1569~1618)

 

자는 단보(端甫), 호는 교산(蛟山). 학산(鶴山). 성소(惺所). 백월거사(白月居士)로 강릉부 사천 외가(애일당)에서 태어났다.

허균의 외조부 김광철이 지은 애일당은 동쪽으로 대해(大海)와 북쪽으로 오대산. 청학산. 보현산이 바라보이는 언덕 위에 있었다. 애일당 뒤에 있는 산등성이는 이무기가 기어가듯 구불구불한 모양을 이루고 있다고 해서 예로부터 교산(蛟山)이라고 한 것도 그의 출생지와 관련하여 지은 것이라 생각된다.

 

허균은 선조 22년(1589년) 생원시에 입격하고, 선조 27년(1594)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로 급제한 후 세자시강원설서(說書)를 거쳐 선조 30년(91599년)에 황해도도사(黃海道都事)가 되었다. 선조 34년(1601)에 형조정랑, 선조 35년(1602)에 성균관 사예(司藝), 사복시정(司僕寺正)이 되었으며, 선조 37년(1604)에 수안군수로 부임하였다가 불교를 믿는다는 사유로 벼슬길서 물러났다. 선조 39(1606)에 유근의 종사관이 되어 명나라 사신 주지번을 영접하면서 탁월한 명문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이듬해 삼척부사가 되었으나 불상을 모시고 참선하였다하여 파직되었다.

 

광해군 원년(1609)에 명나라 책봉사가 왔을 때 이상의(李尙毅) 종사관이 되었고, 이어 형조참의가되었다. 광해군 6년(1614)에 천추사(千秋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고, 이듬해에 다시 동지(冬至) 겸 진주부사(陳奏副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태백준령이 우뚝 솟은 오대산 비로봉에서 낙맥한 교산의 정기를 타고 외가댁인 예조참판 김광철의 애일당(愛日堂)에서 출생하였기에, 허균 생은 자호를 교산(蛟山)이라 하였습니다.

 

강릉시 사천면 하평리의 지명 유래를 “초당 허엽의 아들인 하곡(荷谷) 허봉(許篈)이 태어나 그의 호를 따 하평동(荷坪洞)이라 했다, 교산의 큰형의 호인 악록(岳麓)도 대관령의 험준한 산줄기와 관련이 있다. 그랬기에교산은 『학산초담』에서 “우리 중씨(하곡)와 난설헌 또한 강릉의 정기를 받아 강릉 임영(臨瀛)에서 태어났음을 밝혔고 자랑스러워하였다.

 

초당 허엽선생과 4자녀는 5문장가(五文章家)라 불리면서 조선시대에 대표적인 양천허씨 문중으로 알려졌다, 교산을 비롯하여 4부자가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허균선생이 소년시대의 꿈을 키운 곳은 강릉 초당 475-3번지 고택과 사천 애일당(愛日堂)이다, 허균선생은 유배지 함열에서 고향 강릉을 그리워하는 시를 수십 수나 지었다.

 

교산억기시『蛟山臆記詩』의 강성자<江城子“>와남궁고『南宮藁』소재 우회<寓懷>에서는 강릉 초당을 그리워하는 애절한 심정을 구체적으로 그렸으며, 27세인 1595년 소금강으로 입산하는 양비로를 전송하며 지은 시에 ”저 멀리 상상하니 눈처럼 흰 파도/응당 경포호와 통할 것이라/임그리는 내 천방울 눈물 부쳐주어도/그대는 초당 동쪽에 이르지 못하리라“하였고 초당에 봄이 와도 돌아가지 못하는 이 신세”라 하였다.

 

푸른 송림이 둘러싸인 강릉초당 연화부수형지에서 노닐면서 천부적인 재능에 아름다운 시심과 문학성을 키웠다. 1596년에는 강릉부사였던 정구와 함께 『강릉지(江陵志)』를엮었고 1597년 문과 중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며, 1615년에는 5월 15일 문신 정시에서 1등을 하였다. 그 후 월과에서 여름. 가을. 겨울의 세 분기에 걸친 월과(月課)에서 연달아 장원하였으며 형조판서와 좌참찬에 올랐다. 1998년부터 (사)교산 난설헌학회에서는 두 분에 대하여 국제학술대회와 학술세미나를 개최하여왔으며 교산허균문화제 때 매년 개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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