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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씨오문장가

허씨오문장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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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당공 엽(曄)

악록공 성(筬)

하곡공(篈)

난설헌(許楚姬)

교산공(筠)

 

 

ma04.png  하곡선생 연보(荷谷先生年譜)

허경진 연세대 교수

공의 휘는 봉(篈), 자는 미숙(美叔)으로, 신해년(1551) 6월 25일에 태어났다.

7세. 문장을 지을 줄 알았다.

10세. 경사(經史)에 통하고, 시문(詩文)을 지으면 절로 무르익어 일가를 이뤘다. 총명하고 영특하기가 남보다 뛰어나, 책을 보면 한번 읽고도 잊어버리지 않았다.18세. 무진년(1568) 생원시(生員試)에 장원하였다. 문장과 학문이 나날이 늘어났다.

임신년(1572). 나이 22세 되던 3월 정시(庭試)의 심충겸(沈忠謙) 방(榜)에서 급제하였다. 권지 승문원 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 종9품)가 되었다가 곧바로 뽑혀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 정9품)이 되었다.

 

계유년(1573)에 호당(湖堂)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갑술년(1574)에 예조좌랑(禮曹佐郞 정6품)에 제수되었다.

서장관(書狀官)이 되기를 자청하여 중국에 가서 중원의 사대부들과 주륙지변(朱陸之辨)에 대하여 토론하였다. 천신(薦紳) 선생(先生)들도 감히 굴복하지 않을 수 없어 탄복하였다. 사행(使行)을 마치고 돌아와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이 되었다.

 

을해년(1575)에 이조좌랑(吏曹佐郞)이 되었다가 가을에 을해당론(乙亥黨論)이 일어나자 탄핵을 받고 체직되어 승문원 검교(承文院校檢)가 되었으며,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으로 옮겨졌으나 숙배하지 않았다.

병자년(1576)에 부교리(副校理 종5품)에 제수되었다가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정5품)으로 옮겨지고, 교리(校理)로 전임하였다.

정축년(1577) 가을에 추천받아 의정부 검상(議政府檢詳)에 제수되었다가 사인(舍人 정4품)으로 승진하였으며, 다시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으로 옮겨졌다. 다시 떠나 사인(舍人)이 되었다가 홍문관 응교(弘文館應教)로 옮겨졌으며 예문관 응교(兼藝文館應教)를 겸하였다.

 

무인년(1578)에 어사(御史)가 되어 함경도(咸鏡道)를 순무(巡撫)하였다.

기묘년(1579)에 장령(掌令)이 되고 곧바로 사인(舍人)에 제수되었다가 응교(應教)로 돌아갔다.

경진년(1580)에 부친상을 당하였다.

임오년(1582)에 삼년상을 마치고 사복시 정(司㒒寺正 정3품)에 제수되었지만, 숙배하지 않았다. 여러 차례 응교(應教)ㆍ사간(司諫 종3품)ㆍ집의(執義) 등의 관직에 제수되었지만 모두 출사(出仕)하지 않았다. 겨울에 원접사(遠接使) 이이(李珥)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황장자(皇長子)의 탄생을 알리는 반하조사(頒賀詔使) 황홍헌(黃洪憲)과 왕경민(王敬民)을 의주(義州)에서 영접하였다. (명나라의) 두 사신이 모두 그의 문장에 감복하여 떠날 때에 부채를 주며 시를 지어달라고 부탁하자, 공이 일필휘지하여 주었다. 두 사신이 무릎을 치며 “아름답고도 묘한 작품이로다.”하고 탄복하였다. 황태사가 역관에게 말하기를 “이 사람을 중국에 태어나게 했더라면 옥서(玉署 홍문관)와 금마(金馬 한림원)에서도 마땅히 일등을 양보하리라.” 하였다.

 

계미년(1583)에 전한(典翰 종3품)으로 승진하였지만, 가을에 차자(箚子)를 올려 율곡(栗谷)을 탄핵했다가 특별히 창원부사(昌原府使)로 좌천되었으며, (부임하여) 수레에서 내리자마자 어명이 내려 갑산(甲山)으로 유배되었다.

을유년(1585) 6월에 유배에서 풀려나 자기가 원하는 곳으로 가게 되자, 백운산(白雲山)에 들어가 독서(讀書)하였다. 혹은 인천(仁川)에 살기도 하고 혹은 춘천(春川)에 가기도 해서, 산수(山水)를 떠돌아다니며 마음 내키는 대로 살았다.

무자년(1588) 가을에 금강산(金剛山)에 들어가 구룡연(九龍淵)ㆍ비로봉(毗盧峯)을 둘러보고 대명암(大明菴)에 머물렀다. 공은 평소에 술을 지나치게 마셔 황달(黃疸)이 되었는데다가 시고 찬 것을 지나치게 많이 먹어 한담(寒痰)까지 생겨 몹시 괴롭기에 의원(醫員)에게 보이려고 들것에 실려 동교(東郊)로 향하였다. 9월 17일 금화현(金化縣) 생창역(生昌驛)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 38세였다. 친구 서인원(徐仁元)이 현감(縣監)이었기에 상사(喪事)를 도와, (과천) 상초리(霜草里) 선대부(先大夫) 묘 서쪽에 장사지냈다. 아들 채(寀)는 참봉(參奉)이고, 아들 친(hj-03.jpg)은 뒤에 급제하여 박사(博士) 벼슬을 하였다. 딸은 사인(士人) 김극건(金克鍵)에게 시집갔다. 공은 굳세고 단정하며 상쾌하고 통달하여, 자신의 몸가짐을 확고하게 지켰다. 어떤 일을 옳다고 여기면 흗들리지 않고 붙들었다. 비록 천만 인이 흔들어도 바꿀 수 없었으며, 선한 일을 좋아하고 악한 일을 미워함이 천성에서 나왔다. 비분강개하여 사리를 논할 때에는 비록 주상(主上)이 계신 앞에서도 굽히지 않았으며, 때때로 용안을 범할 정도로 강하게 충간하였다.

 

저술로는 『조천록(朝天錄)』ㆍ『북변기사(北邊記事)』ㆍ『하곡수어(荷谷粹語)』ㆍ『의례산주(儀禮删註)』ㆍ『이산잡술(夷山雜述)』ㆍ『독역관견(讀易管見)』 등의 책이 있었는데, 시문(詩文)들이 병란(兵亂)에 불타 없어지거나 흩어지고, 다만 유고(遺稿) 몇 편이 남았을 뿐이나 참으로 태산에 터럭 하나일 뿐이다. 손곡(蓀谷) 이달(李達)이 시(詩)를 아는데, 이렇게 말하였다. “공의 시는 장편(長篇)과 단운(短韻)이 맑고도 굳세게 휘몰아치니, 청련(靑蓮 이태백)의 유법(遺法)을 깊이 얻었다. 오언시(五言亦)도 또한 맑고 고상하여 당시(唐詩)에 가까운데, 오직 칠언근체(七言近體)만은 소미산(蘓眉山 소동파)의 구기(口氣)를 면치 못했으니, 마치 두 사람의 손에서 나온 듯하다.” 이 말은 참으로 지언(知言)이다. 아아!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무한한 그대의 슬기, 맺히어 대년이 되니, 해와 달은 하늘의 날줄이어서, 광채가 늘 밝으리라.” 하였으니, 아아! 어찌한스러우랴. 내가 중씨(仲氏)에 대한 마음이 또한 이러하다.

-허균(許筠), 『하곡집(荷谷集)』 부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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