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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씨오문장가

허씨오문장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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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당공 엽(曄)

악록공 성(筬)

하곡공(篈)

난설헌(許楚姬)

교산공(筠)

 

 

ma04.png  교산공 허균의 생애와 문장

허경진 연세대 교수

허균의 아버지 초당(草堂) 허엽(許曄)은 글 배우기를 즐겨서 서경덕ㆍ나식 등의 스승들을 찾아다녔다. 이러한 스승 밑에서 글을 배우며 그는 청렴결백한 관리이자 엄정한 유학자가 되었다. 당대 최고의 문장가인 초당ㆍ악록(허성)ㆍ하곡(허봉)ㆍ난설헌(허초희) 밑에서 자라며 가르침을 받은 허균은 타고난 천재성을 일찍부터 발휘했다. 허균과는 반대파였던 유몽인도 『어우야담』에서 어린 시절의 허균을 이렇게 칭찬했다.

 

허균은 총명하고 영특하였다. 태어난 지 아홉 해 만에 시를 지을 줄 알았는데, 매우 아름다웠다. 여러 어른들이 그를 칭찬하면서 “이 아이는 뒷날 마땅히 문장을 잘하는 선비가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오직 한 사람, 그의 매부 우성전만은 그 시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뒷날 문장을 잘하는 선비가 되기는 하겠지만, 허씨 집안을 뒤엎을 자도 반드시 이 아이일 것이다.”그의 집에는 다행히도 책이 많았고 아버지와 형을 비롯해서 그 주위에 스승이 되어 줄 사람들도 많았다. 더구나 그의 기억력은 비상했으므로 한 번 읽으면 줄줄 외웠다. 이렇게 좋은 조건 속에서 그의 문장은 나날이 나아졌다.

 

아버지의 죽음과 문학 공부

 

당시 왜놈들의 정세가 심상치 않았으므로 국가에서는 경상감사를 마땅한 사람으로 뽑느라고 고심하였다. 이산해ㆍ이율곡ㆍ허엽 등이 추천되었는데, 선조는 경험이 많은 허엽을 임명했다. 그가 경상감사로 내려가 있는 동안, 정치를 잘했다고 소문이 났다. 그래서 그를 장차 크게 쓰기 위해서, 우선 판서로 추천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즈음 그는 병을 얻게 되어 벼슬을 내어놓았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상주의 객관에서 숨을 거두었다.나이 차이가 많았던 형들은 그때부터 스승이자 아버지의 노릇을 하며 그를 가르치고 키웠다.

허균은 뒷날의 회상을 통해서, 엄한 아버지가 안 계시고 형들은 자기를 가엽게 여겼기에 버릇없이 자랐다고 고백했다. 칭찬만 받으며 자라다 보니 성리학보다는 문학 공부에 중점을 두게 되었다. 작은 형은 그를 서얼인 천재 시인 손곡(蓀谷) 이달(李達)에게 보내어 시를 배우게 하고, 나중에 영의정에까지 오른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에게 문장을 배우게 하였다. 그의 집안에서는 신분이나 지위보다는 재주와 사람 위주로 스승을 삼았음을 알 수 있다.

 

첫 결혼과 글공부

 

열일곱 살 되던 해에 허균은 장가를 들었다. 아내는 김대섭의 둘째딸이었는데, 허균보다 두 살 아래인 열다섯에 시집왔다.허균은 일생 동안 여러 여인을 거쳐 가며 사랑했지만, 가장 사랑하고 또 아꼈던 사람은 첫째부인 김씨였다. 그는 어진 아내 노릇과 착한 어머니 노릇을 잘하였다. 허균은 어린 나이에 엄한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와 형들의 사랑만을 받고 자랐으므로 버릇이 자유분방하였는데, 이러한 허균을 길들여 가며 훌륭한 문장가로 키운 데에는 홀어머니와 형들 못지않게, 이 아내의 공이 컸다.술집과 기생집을 즐겨 드나드는 허균에게 충고를 한 것도 이 아내였는데, 그렇다고 해서 얼굴에 질투를 나타내지도 않았다. 밤늦도록 허균과 마주앉아서 등불 심지를 돋워 가며 글공부를 지켜본 것도 이 아내였고, 허균이 잠시라도 졸면 우스갯소리를 해가며 그를 일깨운 것도 이 김씨 아내였다.

허균이 아직 과거에 급제하기 이전이었으므로 집안 살림이 넉넉한 것은 아니었지만, 길쌈과 집안 다스림에 힘쓰며 홀어머니를 정성껏 모신 것도 이 아내였다. 허균은 이 아내를 맞으면서부터 마음에 안정을 얻고, 글공부에 전념하게 되었다.

 

작은형은 율곡을 탄핵하다가 귀양 갔는데, 그가 결혼하던 해에 유배가 풀렸다. 예전부터 건천동에 같이 살았던 아버지의 벗 노수신이 영의정에 오르면서 풀려난 것이다. 그러나 선조임금의 명에 의하여 한양성에는 들어오지 못하게 되었으므로,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게 되었다. 그가 백운산에서 글을 읽는 동안, 젊은이들이 그를 찾아가서 글을 배웠다. 허균은 마침 갓 결혼을 한 무렵이었으므로 함께 어울릴 수는 없었다. 그러나 글을 좋아하고 무엇보다도 작은형의 사람됨을 좋아한 그였기에 집안일이 정리되는 대로 작은형을 찾아 들어갔다. 허균의 참다운 글공부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강릉 애일당에서 첫 저서 『학산초담』을 짓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허균의 가족들은 가토오의 군대에 쫓겨가며 칠석날 단천에 이르렀는데, 김씨 부인이 아들을 낳았다. 그러나 그곳에서 마음 놓고 몸을 풀 수가 없었으므로 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어린 딸까지 이끌고서 밤새도록 고개를 넘었다. 10일 저녁에 아내는 끝내 목숨이 끊어졌다.허균은 피난길에 줄곧 타고 온 소를 팔아서 관을 사고, 옷을 찢어서 염을 했다. 아내의 살덩이가 아직도 따뜻해서, 차마 땅에 묻을 수 없었다. 그러나 적이 곧 성을 공격한다는 소문이 들려 왔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아내의 주검을 뒷산 등성이에다 임시로 묻었다. 그리고는 어린 딸과 갓 낳은 아들을 들쳐 업고, 어머니와 함께 다시 피난길을 떠났다. 그러나 갓난아기마저 젖이 없어서 결국은 죽고 말았다.함경도가 왜놈들의 손에 떨어지게 되자, 허균은 배를 타고 강릉으로 피난 갔다. 그곳에는 외갓집이 있고 농사지을 땅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 해 시월 사천 애일당에서 시화집(詩話集) 『학산초담』을 지었다. 자신이 보고 들은 선조(宣祖) 때의 시인들에 대한 시평이 많이 실렸는데, 그 자신이 학당파(學唐派) 시인인 이달에게서 당나라 시를 배웠던 만큼 그 시대의 새로운 흐름인 학당파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하였다.

 

최경창ㆍ백광훈ㆍ이달, 이 세 시인은 다행히도 허균과 가까운 사이였다. 작은형이 이들과 가까운 벗인데다, 허균은 스승 이달을 통해서 이들에 대하여 많은 것을 들었다. 그는 일찍이 많은 책들을 읽었고 기억력도 좋았으므로, 여러 시인들의 시만 읽고서도 그들이 시를 익힌 과정을 날카롭게 파헤쳤다. 또한 당나라의 시가 송나라의 시보다 정감(情感)에 있어서 뛰어났기 때문에, 송시(宋詩)만 배우면 병폐가 생기지만 당시(唐詩)를 제대로 익히면 시의 경지가 나아진다는 것을 밝혔다.이 책에 가장 많이 나오는 사람은 작은형(25군데)이고, 그 다음으로 삼당시인(18군데)과 난설헌(6군데)이다. 허균은 뒷날 함열현으로 귀양 가 있으면서, 무료함을 메우기 위해서 『성수시화』를 지었다.

 

이 책에는 신라의 최치원으로부터 허균 당시의 시인에까지 이르는 비평을 담고 있다. 『학산초담』이 공시적(共時的)인 시화라면, 『성수시화』는 통시적(通時的)인 시사(詩史)이다. 『학산초담』에서 주변의 인물에만 치우친 점을 보완하기 위해 『성수시화』를 지은 것이다.허균은 26세 되던 1594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봄에 그는 중국과의 외교문서를 맡아 보는 승문원에서 일을 보다가 여름에 이조 관직에 천거되었지만, 어머니의 상을 당해서 강(講)에 응하지 못했다. 다음해 가을에 그는 피난길에서 죽은 아내의 무덤을 함경도에서 강릉으로 옮겨왔다.

 

수안군수가 되어 악명 높은 토호를 다스리다

 

1599년 5월 25일에 그는 품계가 하나 오른 종5품 황해도사가 되었으며, 36세에 수안군수가 되었다. 고을의 재정이 넉넉했기에, 그는 하고픈 일들을 맘대로 했다. 명필 한석봉을 불러다 〈광한전백옥로상량문〉을 쓰게 하고, 천재 화가 이정을 불러서 도연명ㆍ이태백ㆍ소동파 세 시인의 초상화를 그리게 해서 창가에 걸었다. 그리고는 자기가 그들을 좋아하는 까닭을 글로 지어서, 역시 한석봉에게 써 붙이게 했다. 허균은 그들의 시만을 좋아한 것이 아니라, 세상에 얽매이지 않고 사는 생활을 더욱 좋아한 것이다. 작은형의 시 238편을 모아서 『하곡집』을 목판본으로 간행하기도 했다.

 

수안군에 이방헌이란 토호가 있었는데, 제멋대로 굴었다. 허균은 예전에 황해도사로 갔었을 때부터 그의 악명을 익히 들었으므로, 기회를 엿보다가 그가 죄를 짓자 옥에 잡아넣었다. 그의 집안에선 허균과 황해감사에게 아울러 뇌물을 넣었다. 허균은 감사의 압력에도 굽히지 않고, 그를 법대로 엄하게 처리하였다. 그는 평소에 매를 맞아 보지 않았으므로, 형벌을 받고 겨우 이틀을 넘긴 뒤에 죽었다. 그의 아들이 진정을 했고, 뇌물을 받은 감사는 허균을 추궁했다. 허균은 자기의 행동이 법에 어긋나지 않았다고 밝힌 뒤에, 벼슬에 연연하지 않고 군수의 인끈을 벗어 놓았다.

 

부처를 섬긴다고 삼척부사에서 쫓겨났지만 자유를 선언하다

 

큰형이 예조판서에 임명되던 1607년 3월 23일에 허균도 종3품 삼척부사가 되었다. 이곳은 동인 서인의 당파싸움이 시작될 무렵에 장인 김효원이 좌천되어 내려왔던 곳이었고, 또한 아버지 허엽이 와서 많은 치적을 쌓은 곳이었다. 그래서 사명감을 가지고 부임했다. 그러나 며칠 만에 그의 벼슬을 거둬들이겠다는 소식이 내려왔다. 사헌부에서 유학자의 아들인 그가 부처를 섬긴다고 탄핵했기 때문이었다.

 

선조는 허균의 재주를 아끼고 있었으므로, 일을 크게 벌이려 하지 않았다. 문과 중시(重試)에서 장원했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나 형들의 문벌에 흠이 갈까 걱정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글읽기를 좋아했기에 불경까지도 즐겨 읽었을 것이라고 변명해 주었다. 그러나 허균을 미워하는 무리들은 며칠이고 다시 계를 올려 탄핵하였다. 선조도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하라’고 허락하였다. 그래서 고을에 부임한 지 겨우 13일 만에 파직의 소식을 듣게 되자, 그는 자기의 마음을 이렇게 시로 나타내었다.

 

예절의 가르침이 어찌 자유를 얽매리오.

뜨고 가라앉는 것을 다만 천성에 맡기려네.

그대들은 모름지기 그대들의 법을 지키게.

나는 나름대로 내 삶을 이루겠노라.

가까운 벗들이 서로 찾아와 위로하고

아내와 자식들은 언짢아하건만,

오히려 좋은 일이나 생긴 듯 즐겁기만 하니

이백이나 두보처럼 이름 날리게 되었음일레라. 〈문파관작聞罷官作2〉

 

불교를 좋아한다는 이유 때문에 자기를 탄핵한 자들에 대하여 그는 승복하지 않았다. 자기를 탄핵한 자들은 성리학을 신봉하는 자들이고, 그들은 결국 ‘예절의 가르침’을 내세워서 인간의 본성을 얽매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허균은 이런 자들의 법에 따라 살기를 거부하고, 나름대로의 삶을 주어진 천성에 따라 살겠다고 나섰다. 이렇게 공공연한 선언을 한 뒤로, 그는 ‘예절의 가르침’에만 얽매인 유학자들과 대결해야만 했다.

 

공주목사를 지내며 서얼들을 돕다

 

1607년 홍문관 월과(月課)에서 허균은 여름ㆍ가을ㆍ겨울 아홉 차례나 잇따라 장원하였다. 그 덕으로 정3품 공주목사가 되었는데, 그는 어려운 벗 이재영부터 불러들였다. 이재영은 판서 이선의 서자라고 하는데, 글재주가 뛰어났다. 이재영은 어머니와 첩까지 데리고 와서 얹혀살았다. 게다가 심우영ㆍ윤계영 등도 함께 와서 신세를 졌다. 그래서 사람들은 “허균이 공주 관아에다 삼영(三營)을 설치하였다.”고 비난할 정도였다.

 

그는 실력이 있지만 서자라는 이유 때문에 벼슬길이 막힌 인물들을 많이 포섭하였다. 처외삼촌이기도 한 심우영을 통하여 서양갑과도 친하였다. 서양갑은 목사 서익의 서자였는데, 영웅이라고 불릴 정도로 재주와 능력이 있었지만 벼슬에 나아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자기처럼 고관의 아들이며 재주까지 있었지만 서자라는 이유 때문에 벼슬길이 막혔던 심우영ㆍ이경준ㆍ김평손 등과 함께 1608년에 연명으로 상소하였다. 벼슬길을 열어 달라고 아뢰었지만, 허락되지 않았다.

 

이들은 불평을 품고 돌아와 여강에 굴을 만들고는, 한 집에서 살림을 했다. 『삼국지』를 모방하여 도원 결의를 했으며, 허균ㆍ이재영과 문예를 논하는 한편 이사호에게서 병법을 배우기도 했다. 서양갑은 자신을 제갈량에게다 견주었으며, 허균도 그를 영웅이라고 칭찬했다. 허균은 서얼 이달에게서 시를 배운 탓도 있지만 스스로도 사회제도에 얽매이길 싫어했기에, 남들이 다 꺼리는 이들과 어울려 사귀었다. 그러나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충청도를 조사하러 나온 암행어사에 의해 그는 파직되었다. 성품이 경박하고 무절제하다는 죄 때문이었다.

 

과거시험에 부정을 저질렀다고 귀양 가다

 

1610년 가을에 왕실에 경사가 겹쳐서, 별시(別試)를 베풀었는데, 허균이 대독관(對讀官)으로 임명되어 채점하였다. 이번 과거에는 시관의 아들ㆍ조카ㆍ사위ㆍ사돈 등 친척들이 많이 응시하였다. 원래 응시자 가운데 친근한 사람이 있으면, 시관을 다른 시험장으로 옮기든지 그만두게 하는 법인데, 이번 과거에는 그렇지를 못했다. 그래서 시관의 친척들이 모두 급제했는데, 여론의 화살은 애꿎게도 허균에게 쏟아졌다. 허균의 조카 허보, 조카사위 박홍도, 제자 이식 등이 합격했기 때문이다. 사헌부에서는 이렇게 아뢰었다.

 

허균은 거자(擧子)들의 시권을 거둬들일 때에 일부러 가까운 자리에 앉아서, 들어오는 시험지들을 하나하나 잠자코 살펴보았습니다. 그는 시권 오백 장을 모두 읽겠다고 자청하였습니다. 과거 급제의 차례를 정할 때에도 자기 마음대로 손을 대면서, 이건 잘 되었고 이건 못 되었다며 마음대로 점수를 주고 불러댔습니다. 그가 합격시키려고 했던 것들은 비록 낙제자의 더미에 있었더라도, 제멋대로 뽑아내어서 올려놓았습니다.

 

원래 임금의 앞에서 과거를 볼 때에는 상석 시관인 독권관(讀卷官)이 응시자들의 답안지를 어전에서 읽는다. 이때의 독권관은 좌의정 이항복과 이정귀ㆍ박승종이었고, 대독관도 넷이나 되었는데, 말석에 앉았던 허균이 그 허물을 모두 뒤집어쓴 것이다. 결국 그는 의금부 감옥에 42일이나 갇혀 있다가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그는 감옥에 있는 동안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서 『성옹지소록』이란 책을 지었다. 예전에 자기가 듣고 본 194편의 짧막한 이야기들을 기록한 책이다. 그가 전라도 함열로 귀양 가는 날, 사관은 『광해군일기』에 이렇게 기록했다.

 

당시에 부형으로서 사사로운 정을 써 자제를 급제시킨 자가 단지 허보의 숙부만은 아니었고, 자제로서 부형을 인하여 과거에 급제한 자가 또한 허균의 조카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균이 그때 인망이 없었고 세상에서 중하게 여기지도 않았으므로, 허보만 홀로 과거 급제를 취소당하고 (허)균만 홀로 죄를 받았다. 사람들이 이 처사에 승복하지 않는 것도 마땅하다.서로들 자기의 세력권을 넓히려고 추종자들을 급제시켰다. 그러나 일이 드러나자, 아직 세력이 덜 구축된 허균 혼자서 모든 죄를 뒤집어쓰게 된 것이다. 조카 허보는 사실 급제할 능력이 있었지만, 그 뒤로 다시는 과거를 보지 않았다. 마포에서 거문고와 책을 즐길 뿐이었다. 그리고 죽은 뒤에야 호조판서를 제수받았다.그는 수안군수로 있을 적에 이정에게 그려 달라고 했던 도연명ㆍ이태백ㆍ소동파의 초상화를 유배지인 함열 숙소의 창가에 걸어 놓고는, 향을 피우며 읍하곤 했다. 그리고 자기가 머물고 있는 집에다 사우재(四友齋)라는 편액을 내걸었다. 도연명ㆍ이태백ㆍ소동파ㆍ허균의 네 벗이 함께 지내는 서재였다.

 

그는 세상의 사람들로부터 버림받는 것이 오히려 자랑스러웠다.그는 구양수(歐陽修)를 이상적인 인물로 생각하면서 35수나 되는 화운시(和韻詩)를 지었다. 학문ㆍ정치ㆍ문학에 아울러 성공한 그의 생애를 부러워하면서, 또한 그의 생애가 자기의 생애와 너무나도 비슷했으므로, 자기의 처지와 심정을 그에게다 견주어 시를 지으며 자신을 달랜 것이다. 그곳에서는 할 일이 별로 없어 바닷가를 돌아다니며 시를 짓기도 하고, 서울의 친지들에게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그러다가 무료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우리나라의 여러 가지 음식에 대해서 설명한 〈도문대작屠門大嚼〉을 먼저 짓고는, 자기가 평생 지었던 글들을 기억나는 대로, 초고가 구해지는 대로 한데 모아서 문집을 엮었다.

 

허균이 자신의 문집 『성소부부고』 편집을 마친 날은 1611년 4월 23일이다. 시(詩)ㆍ부(賦)ㆍ문(文)ㆍ설(說)의 네 갈래로 나누어 책을 엮고는 『사부부부고(四部覆瓿藁)』라고 하였다. 양웅(揚雄)의 글에서 나온 부부(覆瓿)는 ‘장독이나 덮을 정도로 하찮은 글’이란 겸손의 뜻이지만 실제로는 자기를 한나라 대문장가 양웅에게다 견준 것이며, 사부고(四部藁)란 이름도 명나라의 대문장가 왕세정(王世貞)에게 견준 것이다. 그는 유배지에서도 그토록이나 자부심이 강했다.그 당시에 그가 엮었던 문집은 64권이라고 한다. 실렸던 글도 문 400편, 시 1,400편, 설 300여 편이나 되었다니, 아주 방대한 분량이었다. 이것이 그 뒤로 전해지는 과정에서 줄어들어, 현재의 『성소부부고』는 26권뿐이며, 시의 숫자도 그 절반 남짓 될 뿐이다. 이 뒤에 지은 시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만약 이때 자신이 문집을 엮지 않았더라면 역적이라는 누명으로 죽은 그의 문집을 엮어 줄 사람도 없었을 테니, 그의 글들은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다 없어질 뻔했다. 귀양을 왔기에 다행히도 문집을 남기게 된 것이다.

 

『홍길동전』의 배경과 주제

 

『홍길동전』이 언제 지어졌는지, 확실한 기록은 없다. 심지어는 허균의 작품이 아니라는 학설까지도 나와 있지만, 허균의 제자인 택당(澤堂) 이식(李植)의 문집에 실린 〈택당잡저澤堂雜著〉에,허균ㆍ박엽 등이 그 책(수허전)을 좋아하였으며, 그 도적 두목들의 별명을 각각 따서 (자기들의) 별호를 삼고는 서로 놀렸다. 균은 또한 『수허전』을 모방하여 『홍길동전』을 지었다. 그의 무리인 서양갑ㆍ심우영 등도 그 도적의 행동을 직접 행하다가, 한 마을이 결단났다. 균도 또한 (그 뒤에) 역적으로 죽었다.라고 쓴 기록을 무시할 만한 이 이상의 근거는 아직 없다.

 

『홍길동전』을 한문으로 지었다면 문집인 『성소부부고』가 완성된 뒤, 그가 아직 광해군에게 신임을 얻기 이전, 현 사회에 대하여 불만을 가득 품고 있을 무렵에 지었을 것이다. 범위를 좀더 좁히자면 아마도 권력의 핵심에 들어기기 전인 임자ㆍ계축년 사이에 지었을 가능성이 있다.허균이 벗으로 사귀던 서양갑 등의 서얼들이 강변칠우(江邊七友)라는 이름으로 무리지어 어울리다가, 조령에서 은장사를 죽이고 재물을 빼앗았다. 이이첨은 선조의 유일한 적자인 영창대군을 인목대비의 곁에서 떼어내기 위해 이들을 이용하여 역적모의를 뒤집어씌웠다.

 

원래 이들은 영창대군이나 연흥부원군 김제남과 관련이 없었지만, 이이첨에 의해서 사건이 확대된 것이다. 의리를 소중히 여겼던 이들은 모진 고문 속에서도 후원자 허균의 이름을 끝까지 감춰 주고, 그대로 죽어 갔다.그런데 계축년(1613)에는 서얼들의 역모가 크게 사건화된 해이므로, 그가 위험한 분위기 속에서 그런 소설을 썼을 리가 없다고 본다. 어떤 면에선 서양갑ㆍ심우영 등 불평을 품은 동지들에게 용기를 북돋우기 위해서 그보다 앞서, 즉 임자년(1612) 즈음에 지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위에서 이식이 밝힌 이야기를 보더라도, 서양갑과 심우영 등이 이 소설에 나오는 도적의 행동을 직접 해보다가 역적으로 몰려서 죽은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허균이 이들의 불평을 형상화하고 용기를 북돋워 주기 위하여 의식화 교재로 이 소설을 지었는지, 아니면 이들의 사건이 일어난 뒤에 그 이야기를 소재로 해서 『홍길동전』을 지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가 없다.

 

허균은 임진왜란 때문에 역사적 변환기를 맞게 되는 시대에 살았다. 중국에서도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교체되는 시기였으며, 동양사회 전체로 보아도 격변이 가시고 또 다른 충격이 준비되는 시기였다. 임진왜란 중에 왕이 백성들에게 무력한 모습을 보인 일이며, 의병의 일부까지도 도적떼로 바뀌어 날뛰게 된 일 등도 『홍길동전』의 바탕으로 생각할 수 있다.그는 〈호민론(豪民論)〉에서 “두려워해야 할 것은 백성이다”라고 지적하였으며, 〈유재론(遺才論)〉에서는 “하늘이 재주 있는 사람을 내었는데 사람이 이를 가문과 과거를 가지고 한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일반론에서 더 나아가 역사적인 사실을 들어 자기의 비판과 주장을 구체화시키기도 하였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고려조보다 백성들의 시름과 원망이 더 심해졌으므로, 견훤이나 궁예 같은 인물이 나와서 선동하는 날에는 이 백성들이 불평불만이 폭발해 걷잡을 수 없는 사태가 초래될 것이라고 날카롭게 역사 현실을 파헤쳤던 것이다.

 

길동은 “부친을 부친이라 못 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므로 스스로 천한 태생임을 자탄하다가” “몸을 녹림에 붙여 남아의 지기를 펴리라” 마음먹고는, 집을 뛰쳐나가 도적떼의 두목이 되었다. 이러한 작품 전개에는, 서얼들과 가깝게 지내었던 허균의 개인적인 체험과 시대의 선각자였던 그의 문제의식이 복합적으로 깔려 있다. 그는 『홍길동전』을 지어서 현실을 반영하고 비판하려 하였다.

 

실패한 사상가 허균의 죽음

 

1618년 여름에 허균은 하인준ㆍ김윤황 등의 심복들과 함께 혁명을 일으킬 준비를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8월 10일에 하인준이 잡혀 들어가 자백하기 시작했다. 허균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한 이이첨은 김윤황ㆍ하인준을 빨리 죽이자고 아뢰었다. 실제로는 아무런 증거가 없었으므로, 광해군은 무언가 이상한 것을 느꼈다. 김윤황ㆍ하인준의 결안(結案)에는 허균의 역모 사실이 없으니 다시 의논하라고 시켰다. 그러나 이이첨은 허균의 입에서 혹시라도 자기 이름이 나올까 봐, 변명의 기회를 주지 않았다.광해군이 인정문에 나와 앉아서 친히 심문하였다. 그러나 남대문에다 격서를 써 붙였다는 것만 가지고 사형시킬 수는 없었다. 그래서 왕은 이이첨에게 “벌써 사형시키는 것은 너무 빠르다. 물을 만한 일들을 더 물은 뒤에 죽이는 것이 어떤가?” 물었다. 그러나 이이첨은 “도당들이 모두 승복했는데 더 물어 볼 것이 있겠느냐?”며 고집했다.

 

허균은 변명할 기회도 없었고, 남들처럼 결안도 없었다. 왕이 어쩔 수 없이 허락하자, 이이첨이 허균을 끌어내라고 시켰다. 그제서야 허균도 자기가 속은 것을 알고 “할 말이 있다”고 큰소리로 외쳤다. 그러나 국청의 위아래에 늘어섰던 심문관들은 모두 못 들은 척했다. 결국 허균ㆍ하인준ㆍ현응민ㆍ우경방은 역적의 이름을 쓰고 서시(西市)에서 억울하게 처형되었다.

 

허균이 꿈꾸었던 세상

 

그를 평한 사람들의 기록은 크게 두 가지이다. 문장이 뛰어나다는 것과 경망하다는 것이다. 문장이 뛰어나다는 것은 모든 사람의 공통된 평이며, 경망하다는 것은 그를 비난하는 편에서 평한 것이다. 경망하다는 비난에서 좀더 나아가면, 상중에도 기생을 끼고 놀았으며 부처를 믿었다는 비난에까지 이른다. 그렇지만 이러한 비난은 유교의 테두리를 전제로 할 때에만 성립이 된다. 천주교를 들여와서 처음으로 믿었다는 것도 당시에는 죄가 될 수 있지만, 유교의 울타리를 일단 벗어나면 오히려 시대를 앞서 간 선구자가 된다. 사회마다 그들 나름대로 약속된 규칙이 있다. 그 사회의 구성원은 그 규칙을 지켜야만 그 사회의 일원으로서 충돌 없이 살 수 있다. 조선왕조의 규칙은 유교의 경전인데, 허균의 행동은 이를 벗어났다. 그도 이같은 규칙들을 배워서 알긴 했지만, 꼭 지킬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남들보다 앞서가며 시대를 살았던 것이 죄라면 죄일 것이다.

그는 자기가 하는 행동이 떳떳했기에 기생과 같이 잠잔 날에는 일기에다 그 기생의 이름을 밝혔다. 남들이 읽는다고 해서 감추지 않았다. 경망하다고 비난하기 전에, 솔직하다고 이해할 수도 있다.

 

자기들이 다 지키는 사회의 규칙을 그가 깨뜨렸다고 해서 유학자들은 그를 비난했지만, 이 규칙을 깨뜨려야만 시대를 앞서가는 선각자가 될 수 있다.그가 젊었던 시절에 자유분방하게 살았기에 세상이 그를 버렸지만, 그도 나름대로 세상을 바꿔 보려고 했다. 귀양 가기 이전의 그와 이후의 그는 너무 달라졌다. 자기의 몸이 세상에 맞지 않자 자기를 고친 것이 아니라, 세상을 자기에게 맞도록 고치려고 시도한 것이다. 그가 거사를 계획했다는 기록이 전혀 무리한 일은 아니었다. 임금이 되는 과정에서 문제가 있었던 광해군은 왕위 유지에 자신이 없었기에 친형 임해군과 선조의 유일한 적자 영창대군까지 죽이고, 중국에도 엄청난 뇌물을 썼다. 민심은 늘 불안하였으며, 올바른 신하들은 광해군을 포기하고 재야에 숨어 지냈다. 게다가 대륙에선 명나라가 망해 가고 청나라가 일어나는 시기였으므로, 조선 문제에 간섭할 여유가 없었다. 허균은 자기의 이상을 실현할 만한 기회라고 생각하였지만, 봉건적인 사회는 그가 꿈꾼 나라를 완성시킬 때까지 기다려 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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