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씨오문장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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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판서 허공 묘갈명(吏曹判書許公墓碣銘)
허경진 연세대 교수
김세렴(金世濂)
공의 휘는 성(筬)이고, 자는 공언(功彥)이니, 양천인(陽川人)으로 호는 악록(岳麓)이다. 가락(駕洛) 수로왕(首露王)에게서 시작된 고려(高麗) 문경공(文敬公) 공(珙)의 후손으로, 아버지 초당선생(草堂先生)의 휘는 엽(曄)이니, 아우 하곡공(荷谷公) 봉(篈)과 함께 이 시대의 큰 명망을 지녔다. 젊어서 유미암(柳眉巖 유희춘)을 스승으로 섬겼고, 가정(家庭)에서 가르침을 받은 것이 가장 많았다. 천성(天性)이 충후(忠厚)하고 직방(直方)하여1)반드시 예(禮)에 맞게 행동하고, 학문은 육경(六經)에 근본을 두었다. 어떤 일을 할 때에 옳다고 여기면 비록 천만 사람이 다투더라도 움직이지 않았다. 처음 벼슬하여 사국(史局 실록청)에 들어가 정언(正言정6품)ㆍ헌납(獻納 정5품)을 역임하였으며, 이조 낭관을 거쳐 응교(應敎 정4품)ㆍ사인(舍人)ㆍ집의(執義 종3품)로 옮겼다.
이조참의(吏曹參議 정3품)로 승진했다가 대사성(大司成)ㆍ대사간(大司諫)ㆍ부제학(副提學)으로 옮겼으며, 이조참판(吏曹參判 종2품)으로 발탁되었다. 전라도 관찰사(全羅道)로 나가 다스리다가 예조판서(禮曹判書 정2품)로 승진하고 곧바로 병조판서가 되었다가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숙배하였다. 선조조(宣祖朝)에 벼슬하여 학문(學問)과 도덕(道德)으로 사림(士林)의 촉망(屬望)을 받았으며, 협찬하고 천지의 조화를 넓혀2) 그 명성이 크게 드러났는데, 만력(萬曆) 임자년(1612) 8월 6일에 향년 65세로 세상을 떠나 광주(廣州) 토당리(土堂里) 진좌(辰坐) 술향(戌向) 언덕에 장사지냈다.
먼저 좌의정(左議政) 이헌국(李憲國)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일찍 세상을 떠나 후사가 없었다. 뒤에 병사(兵使) 남언순(南彥純)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상냥하고 부드러워 부녀자의 행실을 갖췄다. 공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 같은 곳에 장사지냈다. 아들이 넷인데, 맏아들 실(實)은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正言)이고, 다음은 의(宜)인데 요절하였으며, 다음은 보(), 다음은 ○(○)로 모두유사(儒士)이다. 딸은 넷인데 맏딸은 생원 심유(沈愉)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서윤(庶尹) 홍영(洪榮)에게 시집갔으며, 다음은 급제(及第) 박홍도(朴弘道)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왕자(王子) 의창군(義昌君)의 부인(夫人)이다. 측실에서 난 아들 밀(密)은 사과(司果)이다. 내ㆍ외손(內外孫)이 모두 50여명이다.
광해군(光海君)이 생모(生母)를 추숭(追崇)하려고 하자 공이 예경(禮經)에의거하여 다투었으므로 삭탈관직(削奪官職)되었는데, 금상(今上)이 즉위하여 찬성(贊成 종1품)에 추증하였다. 명(銘)은 이러하다.
德之宏(덕지굉) 지니신 덕 크고도 넓었으며
守之截(수지절) 몸가짐도 엄정하셨네.
石可泐(석가륵) 비석이야 닳아 없어진다 해도
名不滅(명부멸) 그 이름 없어지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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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문의 ‘직방(直方)’은 경(敬)과 의(義)를 뜻한다. 《주역》 〈곤괘(坤卦) 문언(文言) 육이(六二)〉에 “경으로 안을 곧게 하고, 의로 밖을 방정하게 한다.[敬以直內, 義以方外.]”라고 하였다.
2) 원문의 ‘홍화(弘化)’는 찬성(贊成 종1품)을 가리키는데, 악록공이 찬성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