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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씨오문장가

허씨오문장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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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당공 엽(曄)

악록공 성(筬)

하곡공(篈)

난설헌(許楚姬)

교산공(筠)

 

 

ma04.png  난설헌(蘭雪軒) 허초희(許楚姬) 행장

허경진 연세대 교수

본관은 양천(陽川), 이름은 초희(楚姬), 자는 경번(景樊)인데, 난설헌(蘭雪軒)이라는 호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초나라 장왕(莊王)의 어진 아내 번희(樊姬)를 사모하라는 뜻에서 자를 경번(景樊)이라 지어준 것이다. 아버지는 초당(草堂) 하엽(許曄, 1517-1580), 어머니는 예조참판 김광철(金光轍)의 딸이니, 1569년에 강릉 초당에 태어나 외가 애일당(愛日堂)을 오가며 자랐다고 전한다. 아우 허균이 애일당에서 《학산초담》을 지었는데, 64번 시화에서 “강릉부는 옛 명주 땅인데, 산수가 아름답기로 우리나라에서 제일이다. 산천의 정기가 모여 있어서 이인(異人)이 가끔 나온다. 작은형님과 난설헌 또한 강릉의 정기를 받고 태어났다고 할 만하다.”라고 증언하였다.

 

아버지는 이듬해에 경주부윤이 되었으며, 난설헌이 다섯 살 때에는 대사성이 되어 내직으로 영전하였다. 여섯 살 때에는 진하사(進賀使)가 되어 명나라에 들어가 황태자의 책봉을 축하하였다. 그 뒤로도 아버지와 오빠들의 벼슬길은 순탄하였다. 큰오라버니 악록(岳麓) 허성(許筬, 1548-1612)은 천성이 강직하였는데, 아버지의 친구인 미암 유희춘에게 나아가서 글을 배웠다. 뒷날 대사성ㆍ대사간을 거치고 이조·예조·병조의 판서에까지 올랐다. 황윤길과 함께 서장관으로 일본에 다녀온 뒤엔 동인(東人) 선배인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과 달리 도요토비 히데요시(豐臣秀吉)가 침략할 것이라고 왕에게 보고하였다.큰언니는 퇴계(退溪)의 제자인 우성전(禹性傳)에게 시집갔으며, 문과에 급제한 뒤 대사성까지 올랐다. 그는 이론이 명석하고도 고매하였고, 허씨 집안과 함께 동인(東人)에 들었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웠다.

 

작은오라버니 하곡(荷谷) 허봉(許篈, 1551-1588)도 형과 함께 유희춘에게서 글을 배웠으며, 18세에 생원시에 장원하였다.

전한으로 있으면서 시론을 상소하였는데, 성격이 강직하였다. 직제학이던 허봉이 대사간 송응개(宋應漑), 도승지 박근원과 함께 율곡(栗谷)을 탄핵하다가 창원부사로 좌천되었으며, 곧바로 함경도 갑산에 유배되었다. 동인과 서인의 권세가 역전된 이 사건을 역사에서는 계미삼찬(癸未三竄)이라고 한다. 이때부터 친정이 기울기 시작하였는데, 작은오라버니에게 시를 배우던 난설헌은 존경하던오라버니와 헤어지는 설움을 이렇게 시로 읊었다.

 

멀리 갑산으로 귀양가는 나그네여

함경도 가느라고 마음 더욱 바쁘시네.

쫓겨나는 신하야 가태부시지만

임금이야 어찌 초나라 회왕이시랴.

가을 비낀 언덕엔 강물이 찰랑이고

변방의 구름은 저녁노을 물드는데,

서릿바람 받으며 기러기 울어 예니

걸음이 멎어진 채 차마 길을 못가시네.

 

아우 교산(蛟山) 허균(許筠, 1569-1618)은 일찍 아버님을 여의고 형들의 가르침과 귀여움을 받는 막내동이로 자랐다. 어려서부터 조숙하였으며 특히 기억력이 뛰어나서 한 번 읽으면 그대로 외웠다.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에게서 문장을 배우고 손곡(蓀谷) 이달(李達)에게서 시를 배웠다. 글을 짓는 솜씨와 글을 가려내는 솜씨는 일세에 당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이달은 친구 허봉을 통해 난설헌의 시를 받아보고 가르쳤으며, 유성룡은 허균이 편집한 난설헌 시집에 발문을 지어주었다. 초당 허엽과 이들 4남매는 조선시대를 통틀어 으뜸가는 문장가 집안이어서 허씨5문장가라고 불렸다. 매천(梅泉) 황현(黃玹)이 우리나라 시집들을 두루 읽어보며 평하다가 봉(篈), 초희(楚姬), 균(筠) 3남매를 특히 사랑하여 “초당 집안의 세 그루 보배로운 나무(三株寶樹草堂門)”라고 하고는, “제일가는 선녀의 재주는 경번에게 있었네(第一仙才屬景樊)”라고 칭찬하였다.

 

난설헌을 선녀라고 칭찬하였지만, 그의 글재주는 타고났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와 오라버니에게 배운 것이기도 하다. 조선시대에는 여성에게 글을 가르치지 않았으니, 실학파의 대가인 이익까지도 그의 책 《성호사설》에서, “글을 읽는 것과 가르치는 것은 남자가 할 일이다. 여자가 이에 힘쓰면 그 해로움이 끝없을 것이다.”라고 말한 것이 바로 당시 사대부들의 신념이었다. 그러나 아우 허균이 이생(李生)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누님 난설헌의 학맥(學脈)을 이렇게 설명하였다. “형님과 누님의 문장은 집안에서 배운 것이며, 선친은 젊었을 때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에게 배웠다. 모재의 스승은 허백당(虛白堂) 성현(成俔)인데, 그 형 성간(成侃)과 김수온(金守溫)에게 배웠다. 두 분은 모두 태재(泰齋) 유방선(柳方善)의 제자이고, 유공은 문정공(文靖公) 이색(李穡)의 으뜸가는 제자였다.”

 

“집안에서 배웠다”는 말은 아버지 허엽이 허봉과 난설헌을 가르쳤다는 말이니, 허엽은 자신의 학맥을 아들 딸에게 전수하였다. 김안국이나 성현은 당대 최고의 학자이면서도 전형적인 유학자가 아닌 문장가여서 대제학을 역임하였으며, 유방선은 대제학 서거정 한명회를 가르친 학자로, 아들 유윤겸에게 두보(杜甫)의 시를 가르쳐 『두시언해(杜詩諺解)』를 이뤄내게 하였다. 유방선은 대제학 권근(權近)에게 배웠으며,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손녀사위가 되어 학맥을 계승하였다. 이색, 권근, 유방선, 김안국, 허엽을 거쳐 난설헌에게 내려온 이 학맥은당대 최고의 학맥이면서도 그 바탕에 두보(杜甫)의 시, 즉 당시(唐詩)에 대한 이해가 깔려 있다. 난설헌 남매들이 당시(唐詩)를 체득한 것이 바로 가학(家學)이었던 것이다.

 

허엽의 대표적인 스승은 퇴계나 율곡과 달리 독자적인 기일원론(氣一元論) 학설을 제창한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이다. 인간의 죽음도 우주의 기에 환원된다는 사생일여(死生一如)를 주장하여 생사를 초탈하였으니, 난설헌이 〈유선사(遊仙詞)〉 87수를 짓게 된 배경에는 화담의 세계관도 깔려 있다. 그랬기에 임상원도 《교거쇄편(郊居瑣編)》에서 “난설헌은 《태평광기(太平廣記)》를 즐겨 읽었으며, 그 긴 이야기를 다 외웠다.”고 증언하였다. 다 외웠을 뿐만 아니라, 그 이야기를 시 속에 풀어내었다. 제자들이 스승을 선택하는 기준은 그의 학문 뿐만 아니라 세계관이기도 하다. 허균이 기록한 《성옹지소록(惺翁識小錄)》에 의하면 허엽은 엿새 동안 밥을 먹지 않고도 태연자약하게 거문고를 타면서 시를 읊조릴 정도로 세속을 초월한 서경덕을 스승으로 선택하여 그의 수제자가 되었으니, 난설헌 또한 《태평광기》를 탐닉하여 이 책에 등장하는 수많은 신선 선녀들을 〈유선사(遊仙詞)〉 뿐만 아니라 〈광한전백옥루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樑文)〉을 지으면서 불러낸 것이다. 그러나 난설헌이 천재라 할지라도 8세에 〈광한전백옥루상량문〉을 지었다고 전한다. 허균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는데, 중국에서 출판된 난설헌 시집이 천하를 돌고돌면서 높은 인기를 얻자 난설헌 신화가 생겨나 “난설헌이 8세에 〈광한전백옥루상량문〉을 지었다”는 전설이 《서당잡조(西堂雜組)》나 《열조시집(列朝詩集)》같은 책에 실려 있다.

 

난설헌이 몇 살에 결혼하였는지 정확한 기록은 없는데, 당시 관습에 따라 15세 안팎에 시집갔으리라 짐작된다. 아버지와 오라버니들이 모두 높은 관직에 있던 시기였으며, 시댁인 안동김씨 집안도 5대나 계속 문과에 급제한 문벌이었다. 문과에 장원급제한 시할아버지 김홍도(金弘度)는 친정아버지 허엽과 호당(湖堂)에서 함께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한 동기였으며, 시아버지 하당(荷塘) 김첨(金瞻)은 작은오라버니 허봉과 명나라 사신을 함께 응대하며 시를 잘 지어 하의(荷衣) 홍적(洪迪)과 함께 삼하(三荷)로 널리 알려졌다. 허봉이 율곡을 탄핵할 때에동조하다가 계미삼찬(癸未三竄)에 지례현감으로 좌천되었으며, 곧바로 파직되고 죽었다.

 

평생 함께 한 동지였기에 두 친구 사이에 혼담이 오간 것이다. 난설헌보다 한 살 많았던 김성립(金誠立, 1562-1592)은 신혼 시절에 한강에 집을 얻어서 과거시험 공부를 했는데, 별별 이상한 소문이 나돌았다. 이 가운데 난설헌의 사람됨을 가장 잘 전해주는 시화(詩話)를 상촌(象村) 신흠(申欽)이 전하였다. “내가 젊었을 때, 김성립과 다른 친구들과 함께 집을 얻어서, 과거공부를 같이 했다. 한 친구가 ‘김성립이 기생집에서 놀고 있다’고 근거 없는 말을 지어내자, 여종이 이를 듣고는 난설헌에게 몰래 일러바쳤다. 난설헌이 맛있는 안주를 마련하고 커다란 흰 병에 술을 담아서, 병 위에 시 한 구절을 써서 보냈다. ‘낭군께선 이렇듯 / 다른 마음 없으신데, / 같이 공부한다는 이는 어찌 된 사람이기에 / 이간질을 시키는가.’ 그래서 난설헌은 시에도 능하고 그 기백도 호방함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시화휘성(詩話彙成)》난설헌이 시집간 뒤에도 허봉은 난설헌의 공부를 도와주었다.

 

1582년 봄에는 7년 전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구했던 《두율(杜律)》 뒤에 발문을 써서 주며, 두보의 시를 배우게 했다. 난설헌이 아우 허균이 지은 시를 고쳐준 이야기는 임상원의 《교거쇄편》에 실려 있다. “허균이 글재주가 남보다 뛰어났는데, 어릴 적에 한번은 ‘여인이 그네를 흔들며 밀어 보낸다’는 시를 써서 누님 난설헌에게 보였다. 난설헌이 보고 말했다. ‘잘 지었다. 다만 한 구절이 잘못되었구나.’ 아우 균이 물었다. ‘어떤 구절이 잘못되었습니까?’ 난설헌이 곧 붓을 끌어다 고쳐 썼다. ‘문앞에는 아직도 애간장을 태우는 사람이 있는데, 님은 백마를 타고 황금 채찍을 쥔 채 가버렸네.’” 시집살이 몇 년 동안에 친정아버지, 작은오라버니가 계속 세상을 떠나고, 어린 아들과 딸까지 세상을 떠났다. 여성이 시 짓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봉건적인 사회에서 시를 짓느라 심신이 쇠약해져, 아들과 딸까지도 약하게 태어났던 것이다. 어머니로서의 난설헌의 모습은 〈곡자(哭子)〉 시에 잘 나타나 있다.

 

지난해에는 사랑하는 딸을 여의고

올해에는 하나 남은 아들까지 잃었네.

슬프디 슬픈 광릉의 땅이여

두 무덤 나란히 마주보고 서 있구나.

사시나무 가지에는 쓸쓸히 바람 불고

솔숲에선 도깨비불 반짝이는데

지전을 날리며 너의 혼을 부르고

너의 무덤 위에다 술잔을 붓노라

너희들 남매의 가여운 혼은

생전처럼 밤마다 정겹게 놀고 있겠지

비록 뱃속에 아이가 있다 하더라도

어찌 제대로 자라날 수 있으랴.

하염없이 슬픈 노래를 부르면서

피눈물 울음을 속으로 삼키네.

 

난설헌은 1585년 봄에 강릉 외삼촌댁에 머물면서 자신이 27세에 세상을 떠날 것이라고 예감한 시를 짓더니, 1589년 3월 19일(음력) 27세에 세상을 떠났다. 경기도 광주시 초월읍 경수산 안동김씨 서운관정공파(書雲觀正公派) 선영에 묻혔으며, 아들 희윤(喜胤)과 딸의 무덤이 옆에 나란히 있다. 오른쪽에는 〈곡자(哭子)〉 시가 새겨진 난설헌시비가 세워져 있다.난설헌은 자신의 시를 불태우라고 유언했지만, 아우 허균이 ‘다 없어질까 걱정되어’ 적어놓은 시를 편집하였다. 1590년에 스승 유성룡에게 발문(跋文)을 받았으며, 정유재란에 참전한 명나라 장수 오명제(吳明濟)에게 난설헌의 시 200수를 주어 《조선시선》에 58수가 실렸다. 명나라에서 남방위(藍芳威)가 1604년에 간행한 《조선시선전집(朝鮮詩選全集)》에 91수가 실리고, 반지항(潘之恒)이 1608년에 간행한 《취사원창(聚沙元倡)》에 169수가 실렸다.

 

국내에서는 허균이 1608년 공주에서 210수를 편집한 《난설헌시(蘭雪軒詩)》를 처음 간행하였으니,난설헌의 시는 그 이전에 이미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진 것이다. 1711년에는 일본식 한자에 가에리텐(返り点)과 군텐(訓点)을 표기한 《난설헌집》 2권 1책에 210수가 실려 분다이야 지로베이에(文臺屋次郞兵衛)에서 2권으로 간행되었으니, 한국 시인으로는 유일하게 한국, 중국, 일본에서 모두 시집이 출판된 시인이 되었다. 봉건적인 이 땅에 살며 자유로운 신선세계를 시로 짓던 그의 꿈이 이뤄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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